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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우 Mar 18. 2022

할머니께는 부적을 사드리지 못했다.

기장의 용궁사는  거대한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 같다.


찾아갈 때마다 눈이 시릴 정도의 바람이 부는 그곳은 파란 바다가 펼쳐진 곳의 벼랑 끝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그곳의 전경 때문인지, 용궁사는 가기만 해도 머리가 시원해진다. 


언젠가 나는 남동생이 차 사고가 나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서 나는 왠지 용궁사에 가서 공덕을 드려야만 할 것 같았다. 동생이 범띠라서, 기도발을 받으려면 용 정도는 품은 절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미신적인 이유를 들어서 나는 엄마를 끌고 일요일의 복잡한 도로를 뚫으며 용궁사에 갔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용궁사를 방문해 마음에 드는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동생을 위해 기도하며 성의금 만원을 넣었다. 


며칠 후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동생이 말하길, 내가 용궁사를 다녀온 다음 날 저녁, 운전하는 도중 중앙선을 넘는 커다란 덤프트럭과 사고가 날 뻔했다고 하더라.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용궁사에 가서 동생이 화를 피한 것일까? 하여튼, 그 일이 있고 다음부터 종종 용궁사를 찾곤 했다. 


나는 본래가 부적에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바를 부적에 한가득 담아서 지갑에 지니고 다니며 부적이 눈에 보이거나, 생각날 때마다 내 간절한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곤 한다.


그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친구들과 용궁사를 방문했던 일이 생각이 난다. 절 안의 관광용품점에서는 통에 여러 개의 부적들을 담아두고 갖가지 좋은 이름들을 붙여 팔고 있더라. 게 중에 눈에 띈 것이 `마음 평화` 부적이었다. 우울하기도 하고, 마음이 심란해서 그랬는지 나는 주저 없이 그 부적을 사기로 했다. 늘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한 친구는 `건강` 부적을 샀다. 함께 간 친구 커플도 각자 부모님께 선물할 염주나 부적을 골랐다. 


부적을 산다고 정말 내가 부자가 되거나, 원하는 일이 다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부적을 고르는 시간이 재미있더라. 


`절`을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 것이 우리 외할머니다. 집에서 함께 사는 내 외할머니는 독실한 불고 신자다. 용궁사에 갔을 때 할머니께 드릴 염주를 고르다가, 옷장 위에 쌓여 있는 여러 개의 염주가 생각이 나 그만뒀다.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기가 뭐 해서 부적을 사 드릴까 했다. 


절에서는 부적을 그려서 파는 것이 아니라고 화를 내실 테지만, 또 외손녀가 당신 생각해서 선물을 가져간다면 좋아하실 테다.


갖가지 부적들의 이름을 보며 할머니께 필요할 만한 부적을 골라보았다. 사업을 위한, 공부를 위한, 또는 결혼을 위한 다양한 부적들이 있었지만, 91세의 우리 외할머니에게 그래도 제일 필요해 보이는 것은 건강 부적이었다. 


용궁사를 방문했을 때는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몇개월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원래가 중풍이 있으셨던 할아버지는 집에서 2년 정도를 함께 살다가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아버지의 지인이 운영하는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계시다가 몇 주 정도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홀로 병상에서 운명하셨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병원에서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온 가족이 달려갔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2분 전 운명하셨더라. 


할아버지, 죄송해요. 


어쨌든, 우리 할머니는 입이 닳도록 할아버지가 빨리 죽어야 한다고 (진심은 아니셨지만) 말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우울하시다. 언제나 할아버지의 마지막 그 모습이 당신의 다음 운명이라고 생각하신것이다. 


할머니는 벽에, 문고리에 대변을 묻히고 돌아다니는 당신의 남편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늘 사과를 하곤 했다. 

"야들아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빨리 죽어야 되는데."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며칠 뒤에 할머니는 나에게 당신이 아파지고, 중풍을 앓게 된다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고 잊으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웃으며 할머니를 안아드리며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조금은 상상이 된다. 


그때의 생각이 나면서 건강 부적을 살 수가 없더라. "할머니 건강하세요~" 이 말이 할머니에게 어떤 부담감을 줄 것 같았다. 건강하지 않으면 내게 짐이 된다는 말을 친절하게 돌려 말한다는 느낌. 


그 부적을 고르려다 문뜩 슬퍼졌다. 


우리 할머니는, 똑똑하고 밝고, 영리한 우리 할머니는 내가 함부로 당신의 건강을 바라기에는 죄송한 나이가 되셨다. 


어릴 때는 일제강점기를 겪으시고, 나이가 들어서는 6.25를,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IMF를 겪으며 이 나라의 굵직한 현대사는 다 겪은 우리 할머니... 요즘에는 미디어아트 전시관에만 가더라도 요즘 한국이 이렇게나 기술 강국이 되었냐고 좋아하신다. 당신의 눈에 더 신기하고 진귀하고 좋은 것들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다리가 떨려 걷지 못하고, 눈이 흐려져 자세히 보지 못하더라도 저는 끝까지 많은 것들을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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