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루에서

2025. 11.

by 알록

미식축구 감독 배리 스위처는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인생을 산다"고 했다. 배경과 운을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는 '금수저의 오만'을 꼬집는 명문이다. 확실히 헬기를 타고 정상에 내린 뒤 자신이 등반했다고 믿는 이들에게, 주제 파악과 겸손을 요구하는 이 말은 유효하다.


하지만 이 명언이 지금 흙바닥을 구르는 모두에게 통하는 진리인지는 의문이다. 이미 3루를 점유한 기득권에게는 성찰의 도구일지 몰라도, 당장 타석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3루는커녕 1루조차 밟지 못한 채 투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해야 하는 이들에게 '3루의 자만'을 논하는 건 사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야구의 통계 혁명을 다룬 <머니볼>의 철학처럼, 중요한 건 '어떻게든 출루하는 것'이다. 관중을 열광시키는 홈런이나 깔끔한 안타만 정답이 아니다. 투수의 실투로 얻은 볼넷이든, 빗맞은 행운의 내야 안타든 상관없다. 심지어 공을 몸으로 받아내는 사구(死球)의 고통을 감수해서라도 1루를 밟아야 한다. 폼이 엉성하다고, 과정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받을지언정 베이스 위에 서는 자만이 득점의 기회를 얻는다.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타석의 공포도, 1루의 간절함도 모른 채 더그아웃에 앉아 입만 여는 것이다. "쟤는 운이 좋았어", "자세가 틀렸어"라며 냉소하는 건 쉽다. 하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말처럼, 비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사람은 경기장(Arena) 안에서 흙먼지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채 서 있는 투사다. 타석에 서 본 적 없는 사람의 고상한 훈수보다, 삼진을 당하더라도 방망이를 휘두르다 넘어진 타자의 흙 묻은 유니폼이 훨씬 위대하다.


그가 3루에서 태어났든, 3루타를 쳤든 그건 내 통제 밖의 일이다. 자만하지 말라는 격언을 되새기되, 그것이 타석에 들어서지 않을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남의 3루타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꼴사납게 몸에 공을 맞고서라도 1루로 뛰쳐나가는 투지다. 평론은 경기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2025. 11.)


내일 오전7시30분

WBC 8강전.

어려운 승부인데요.

승패를 떠나 후회없는 경기를 해주길 기원합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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