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1
준호의 편지1
수진아,
장례식장에서 네 얼굴을 본 순간, 50년이 통째로 지워졌다.
검은 예복에 흰머리 단정히 묶은 모습, 예배당 의자에 앉아 성경을 넘기던 그 소녀가 거기 있었다. "준호 오빠?" 그 목소리에 내 심장이 68년 만에 처음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내 곁에서 4년 동안 잠들어 있던 심장이, 갑자기 깨어난 거야.
며칠째 네 생각뿐이다.
밤이면 창밖만 바라보다 아내 사진 앞에 앉아 중얼거렸다. "여보, 미안해. 그런데 나, 아직 살아있나 봐."
그동안은 그냥 버티는 날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TV 보고, 글 쓰고, 지인 경조사 다니고. 그게 다였다. 그런데 너를 본 뒤로 모든 게 색깔을 되찾았어. 가로등 불빛이 왜 이리 따뜻한지, 바람 소리가 왜 이리 생생한지. 68살에, 다시 세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네가 나를 보던 눈빛을 떠올린다. 조금 놀란 듯, 그래도 어디선가 본 듯 따뜻했던 그 눈. 나도 그랬어.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기만 하던 내가, 너를 보니까 아, 아직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싶었다.
50년 전 이야기, 굳이 길게 꺼내지 않겠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고, 세상은 우리를 너무 쉽게 갈라놓았다. 집안 반대라는 벽 앞에서 우리는 그냥 포기했다. 그 뒤로 각자 결혼하고, 자식 낳고, 손주 보고,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그렇게 흘러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모든 세월이 무색하게, 네 이름만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그때 그 자리, 그 감정이 아직 살아있는 거야.
너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나는 잘 있다가도 한 번씩 혼자라는 사실이 힘들어. 아침에 눈 뜨면 옆자리가 텅 비어 있고, 자식들은 전화로 "아버지, 식사하셨어요? 건강하세요?" 하고 만다. 안 먹었어도 먹었다고 해야 그들이 안심하니까. 그저 '잘 지낸다'만 반복할 뿐이다.
외로움이라는 게, 이렇게 천천히 사람을 갉아먹는 줄 몰랐다.
너도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장례식장에서 네가 지인들과 이야기하는 모습, 웃고 있었지만 눈가가 살짝 붉었어. 남편 떠난 지 3년 됐다고 했지? 그 시간 동안 너 혼자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을까. 나처럼 창밖만 바라보고, 사진 액자 앞에 앉아 혼잣말하고, 가끔은 "왜 나만 남았을까" 하며 울었을까.
수진아,
이 편지는 네가 아직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게 고마워서 쓰는 거다.
네가 괜찮다면, 가끔 이렇게 편지라도 주고받고 싶어.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로.
아무튼, 네가 이 편지를 읽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면 좋겠다.
나도 네 편지 한 통만 기다릴게. 꼭 답장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해줘.
2024년 늦가을
준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