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의 첫번째 편지

끝사랑 2

by 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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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의 편지1


준호 오빠,


편지가 왔을 때, 며칠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어요.

열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그냥 거기 있다는 것만 알면서 지냈어요. 아침에 서랍 손잡이를 잡았다가 도로 닫고, 저녁에 또 잡았다가 또 닫았지요. 이상하게 봉투를 여는 순간 어떤 문이 열릴 것 같아서. 한번 열리면 다시 닫을 수 없는 종류의 문이요.


결국 이틀째 되던 밤에 읽었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들리던 밤이었어요. 마침 그날따라 남편 기일에 다녀온 길이라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거든요. 젖은 외투도 못 벗고 부엌 의자에 앉아서 읽었어요. 다 읽고 나서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오빠, 나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누구한테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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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오빠를 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먼저 오빠 손을 봤어요. 연하의 청년부 오빠가 기타를 치던 그 손이요. 악보를 넘겨주다가 손가락이 스쳤을 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그런데 거기 흰 국화꽃 앞에 서 있는 오빠 손에는 세월이 가득 새겨져 있었어요. 그 세월 어딘가에 내가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서, 반가우면서도 어딘지 아렸어요.


오빠가 말한 것처럼, 50년이 지워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동시에 그 50년이 더 선명하게 들어오는 순간이기도 했어요. 오빠가 그 세월을 살아낸 사람이고, 나도 그랬다는 것.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득 안고 거기서 마주 선 것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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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떠나고 처음 몇 달은 무감각했어요. 슬프지도 않더라고요. 그냥 집이 조용했어요. 4년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면서 온 정신이 긴장해 있다가, 갑자기 그 긴장이 사라지니까 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멍했던 것 같아요.


진짜 외로움은 반년쯤 지났을 때 왔어요.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갑자기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왜 이걸 치는지. 누구한테 들려주려는 건지. 남편은 음악을 잘 몰랐지만, 내가 치면 꼭 부엌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거든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들었어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 당연함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어요. 나는 평생 그 사람 한 명을 위해 피아노를 쳐왔다는 걸.


지금도 가끔 쳐요. 하지만 예전처럼 몰입이 안 돼요. 중간중간 손이 멈추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처져요.

오빠가 '외로움이 천천히 사람을 갉아먹는다'고 했지요. 맞아요. 소리도 없이 갉거든요. 아이들은 잘 몰라요. 식사하셨어요, 건강하세요, 교회 잘 다니세요. 나도 그쪽처럼 "응, 잘 지내" 만 해요. 그래야 서로 안심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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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솔직히 말할게요.


이 편지를 쓰는 게 조금 무서워요.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오래된 기억이 반가운 것인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 경계를 모르면서 선을 긋는 것도 우습고, 모른 척하는 것도 솔직하지 못한 것 같고.


50년 전 오빠는 내 첫사랑이었어요. 지금도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면 다른 이름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 그때의 스무 살이 아니고, 오빠도 그때의 오빠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각자 사랑하며 살았고, 각자 배웅을 했고, 이제 각자의 고요 속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오빠, 편지 주고받아요. 그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로. 그 말이 따뜻했어요.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 둘 다 아직 모르지만, 모르면서도 걸어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이게, 젊을 때는 할 수 없었던 방식의 용기일지도 모르겠어요.


비가 그쳤어요. 바깥이 서랍 속 오빠 편지처럼 차갑고 고요해요.

다음 편지 기다릴게요.



2024년 늦은 11월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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