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의 두번째 편지

끝사랑 3

by 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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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편지2


수진아,


편지를 받고 사흘을 꼬박 앓았어.

아니, 앓았다는 말이 이상하겠구나. 그냥 편지를 가슴에 품고 누웠다 일어났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누군가 보면 환갑 넘은 노인이 무슨 첫사랑 편지 받은 중고등학생처럼 굴었다고 할 모양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지금 딱 그 꼴이야.


네가 편지를 받고 이틀을 서랍에 넣어두었다고 했지. 나는 그 이야기를 읽는데, 문득 그 서랍이 보이는 거야. 네 화장대에 있는 서랍. 네가 아침에 손을 댔다 도로 빼고, 저녁에 다시 빼었다 도로 밀어넣던 그 손길. 그 이틀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일들이 네 마음을 지나갔을까.


그러다 비 오는 날, 남편 기일에 다녀와서, 젖은 외투도 못 벗고 식탁 의자에 앉아 내 편지를 읽었다는 그 장면에서 나는 끝내 울고 말았어.


수진아, 나는 그 순간 네가 보였어. 주방 형광등 아래, 외투에서 물방울 떨어지고 있을 그 시간. 읽고 나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던 네 모습이. 그리고 내가 왜 울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 그 장면이 너무 외로워서였는지, 그 외로움을 나에게 들켜버린 네가 안쓰러워서였는지, 아니면 그런 외로움을 나에게 보여줄 만큼 네가 나를 믿어준 게 고마워서였는지.


다 그런 것 같아. 셋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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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장례식장에서 내 손을 보았다는 이야기, 거기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어.

맞아. 나도 기억해. 네가 악보를 넘겨줄 때 스치던 그 손가락. 나는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그 손가락의 온도를 가슴에 두고 누워 있었지. 그런데 그 손이, 이제는 세월이 새겨진 손이 되어, 흰 국화꽃 앞에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니.


네 말처럼 그 세월 어딘가에 네가 없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아팠겠구나.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네가 나를 보며, 반가움과 함께 아림을 느꼈다는 걸.


내가 그 장면을 읽으면서, 수진아,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아니야. 그 세월 어딘가에 네가 없었던 게 아니야.


네가 없는 세월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나는 그제야 알았어. 가끔씩 밀려오던 그 저림, 이름 모를 향수, 무덤덤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가슴을 쥐어짜던 어떤 기억의 파편들. 그게 다 너였어. 그 모든 시간 속에 네가 없었다면, 그런 저림은 없었을 거야. 너는 항상 거기 있었다. 내 가슴 한편에, 의식의 저편에, 아주 오랫동안.

그걸 네가 내 손을 보고 깨닫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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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야기, 피아노 이야기, 다 읽었어.

수진아, 나는 네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편지 한 장으로 다 알 것 같아. 부엌에서 나와 소파에 앉아 듣던 사람. 음악을 잘 몰라도, 그냥 네가 치니까 들어주던 사람. 그 당연함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내 생각이 났어.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나는 참 말수가 적었어. 글을 쓰는 사람이 왜 그리 말이 없었는지 모르겠어.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한잔 하고 책상 앞에 앉았고, 점심 먹고 또 앉았고, 저녁엔 소파에서 TV 보다 잠들곤 했지. 아내는 내 곁을 맴돌았어. 차를 타주고, 간식을 놓아주고, 내가 기침하면 약을 챙겨주고. 그런데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 마치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서, 그런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 양.


아내가 떠나고, 나는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게 됐어. 밥을 해도 혼자 먹자니 입에 안 들어오더라. 그제야 알았어. 그동안 아내가 해준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아내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증거였다는 걸. 내가 매일 먹던 것은 밥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걸.


수진아, 그래서 나는 네가 피아노 앞에서 손이 멈출 때, 누구를 위해 치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 마음이 어떤지 알아. 나도 지금 그렇거든.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지 모르겠어. 독자를 위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그냥 아내가 지켜봐 주던 그 습관 때문에?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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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한 '경계' 이야기, 내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야.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마음이, 50년 전 그 소녀에 대한 첫사랑인지,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한 너, 즉 68살의 수진이라는 여자에 대한 새로운 감정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니면 그냥 외로움이 만들어낸 착각인지도 모르고. 그 경계가 너무 흐릿해서, 그것을 굳이 나누려는 게 오히려 부질없는 일인지도 몰라.


하지만 수진아, 한 가지는 확실해.

네가 보낸 이 편지, 너의 진심이 담긴 이 편지. 이걸 읽고 내가 사흘을 꼬박 누웠다는 사실. 그게 내게는 가장 확실한 거야. 이 나이에, 이 정도로 흔들린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분명한 건 이 감정은 거짓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편지 주고받기로 한 거지?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로. 그런데 그 '안부' 속에 이런 이야기들, 이런 진심들, 이런 눈물이 담겨도 되는 거지? 괜찮은 거지? 서로 가끔 울려도, 서로 가끔 설레게 해도, 서로 가끔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해도 괜찮은 거지?


나는 괜찮아. 아니, 오히려 그게 좋아. 그게 살아 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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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서울 올라갈 일이 있어.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잡지사 편집장이 정년퇴임을 한다고 해.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20년 넘게 내 원고를 받아준 사람이야.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혹시 그때, 네가 괜찮다면, 시간이 된다면, 한번 만날 수 있을까?


식사라도 하고, 커피라도 한잔 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곳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시간만. 그게 너무 욕심일까. 만약 부담스럽다면, 편지로만 해도 나는 좋아. 네가 말한 그 경계, 우리가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할 그 선. 내가 너무 성급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네가 편지에서 말한 '모르면서도 걸어볼 수 있는 나이'라는 말, 나는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어. 맞아. 젊을 때는 몰랐을 용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아. 무엇을 잃을지 아니까 두렵지 않은 용기. 아니면, 이미 다 잃어버려서 더 잃을 게 없는 용기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너 편한 대로 답해줘.


나는 네 다음 편지 기다릴게. 그게 부엌에서, 혹은 피아노 앞에서, 혹은 서랍 속에서 나를 기다릴 네 글씨를 생각하면, 요즘 아침에 눈 뜨는 게 조금 설레.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 감기 조심하고, 따뜻하게 입어요.



2024년 첫눈 오던 날

준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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