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의 두번째 편지

끝사랑 4

by 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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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의 편지2


준호 오빠,


오빠 편지를 읽던 날, 창밖에도 눈이 내렸어요. 편지 날짜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눈을 보고 있었다는 걸. 이상하게 그게 제일 먼저 가슴에 닿았어요.


오빠가 사흘을 앓았다고 했지요. 나는 그 말을 읽고 한참을 웃었어요. 나쁜 웃음이 아니에요. 그냥 반가운 웃음. 나도 그랬거든요. 서랍에서 꺼내 읽은 그날 밤, 나는 결국 피아노 앞에 앉았어요. 무얼 치려던 것도 아닌데 그냥 앉았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건반 위에 두 손만 얹은 채로 한참을 있었어요. 손이 떨렸어요. 오빠, 예순일곱에 손이 떨렸어요. 나도 딱 그 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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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그 세월 어딘가에 내가 없었던 게 아니라고 했지요.


그 문장을 읽는데, 나는 이상하게 울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주 고요해졌어요.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퍼지잖아요. 그런데 가끔 너무 크고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기는 일었는데 물이 너무 깊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런 고요였어요.


나는 그 말을 믿어요. 그런데 동시에, 그 말이 너무 커서 내가 다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오빠, 조금 천천히 꺼내줘요. 나는 아직 그 말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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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이야기, 고마워요.


오빠가 말수가 적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오빠,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빠가 말수가 적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가끔 말 대신 다른 것으로 사랑을 하거든요.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같은 공간을 숨 쉬는 것으로. 아내분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오빠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오빠가 거기 있다는 증거였다는 걸.


밥이 사랑이었다는 말, 나는 그 말이 제일 좋았어요. 그 문장 옆에 줄을 긋고 싶었어요. 남편도 그랬을 거예요. 내가 치는 피아노가 자기한테는 그냥 음악이 아니라, 내가 거기 살아 있다는 소리였을 거예요.

우리는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속에서 살았군요.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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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 대해서요.


오빠, 나는 만나고 싶어요. 그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직 아닌 것 같아요.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오빠를 조금씩 다시 알아가고 있어요. 50년 전의 오빠가 아니라, 지금의 오빠를. 밥을 사랑으로 먹었던 사람이고, 사흘을 앓는 사람이고, 첫눈 오던 날 편지를 쓰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어요. 만나기 전에.


얼굴을 보면 달라지거든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편지에서는 내가 읽고 싶은 속도로 읽을 수 있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얼굴을 마주하면 그럴 수 없잖아요. 나는 아직 조금 더 이 속도가 좋아요.


그리고 솔직히, 오빠. 무서운 것도 있어요.


우리가 만나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오빠 자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장례식장에서 오빠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불편한 기색이 있었어요. 아직 아무것도 아닌데도. 내가 편지를 주고받는 것조차 알면, 무어라 할지. 나는 그 싸움을 할 자신이 지금 당장은 없어요.


이 말을 쓰면서 스스로가 좀 작아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해요. 이 나이에 자식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 아이들도 내가 낳은 사람들인데.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저렇게 거친 말로 나오는 거라는 것도 알고.


그러니 오빠, 조금만 기다려줘요. 이 편지들이 쌓이면, 우리가 서로를 좀 더 알게 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때가 올 거예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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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이야기를 하나 더 할게요.


오늘 오후에 오랜만에 제대로 쳤어요. 슈베르트 즉흥곡 D.899 중 세 번째 곡. 원래는 슬픈 곡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어요. 그냥 따뜻했어요. 아마 오빠 편지 때문이겠지요.


치면서 생각했어요. 청년부 시절, 오빠가 기타 치고 내가 피아노 치던 날들. 우리 음이 잘 맞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 처음부터 같은 박자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50년이 지나도 이렇게 편지의 결이 맞는 건지도 몰라요.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편집장 퇴임식, 잘 다녀오세요. 20년 넘게 원고를 받아준 사람이면, 오빠 인생에서 작지 않은 자리였겠지요. 인사하러 가는 오빠 모습이 그려져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빠도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다음 편지 기다릴게요.



2024년 12월 이른 겨울날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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