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의 세번째 편지

끝사랑 5

by 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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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편지3


수진아,


퇴임식 다녀왔다.

20년 동안 내 원고를 받아준 사람이, 이제 정년이라니. 퇴임식장에서 그 사람을 보는데, 문득 서글퍼지더라. 우리 모두 이렇게 하나씩 물러나는구나. 자리에서, 시간에서, 삶에서.


축사도 하고, 꽃다발도 받고, 다들 그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지. 그런데 나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그동안 만들어온 것들은, 결국 종이 위에 찍힌 잉크일 뿐이라는 것. 그 잉크가 마르면, 모든 게 사라질 것만 같은 허망함.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어.


"선생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원고는 항상 마지막 페이지가 기다려졌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기다려졌다는 사실이, 이 나이에 얼마나 큰 위로인지 깨달았지.


퇴임식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소주를 마셨어.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어. 그러다 문득, 너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이 일었어. 아니, 거의 전화기를 들었어. 그런데 놓았어. 네가 아직 만나기 전의 속도가 좋다고 했기에, 나는 그 속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대신 이렇게 편지를 쓴다.

수진아, 나는 오늘 알았어. 이 나이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기다려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그게 직업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고, 내가 보내는 편지가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며칠 전, 큰아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아버지,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하길래, 나는 아무 일 없다고 했어. 글 쓰고, 가끔 산책하고, 지인들 만나고. 그런데 아이가 말하더라. "아버지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네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나는 깜짝 놀랐어. 목소리에 그렇게 변화가 있었나. 좋은 일이라... 글쎄, 수진아,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요즘 아침에 눈 뜨는 게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에는 눈 뜨면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요즘은 '오늘도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기대 같은 게 생겼어. 그게 네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런데 그걸 아이에게 말할 수는 없잖아.


아이는 내 침묵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아버지, 혹시... 여자 문제 아니죠?" 하고 농담처럼 물었어. 나는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뜨끔했지. 이게 벌써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아이들이 뭔가 눈치챈 걸까.


수진아, 너는 어떤가.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던가. 아니면 우리는 아직 그들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건가.



어제는 동네 서점에 다녀왔어.


오래된 작은 서점이야. 큰 서점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책도 많지 않지만, 주인 할아버지가 정성껏 고른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곳. 나는 가끔 그곳에 들러, 책 냄새를 맡고,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몇 페이지 읽다 오곤 해.


그날도 그냥 들렀는데, 문득 네가 생각나더라. 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의 그 표정. 집중하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그런 얼굴.


그래서 책을 한 권 골랐어.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우리 세대에게는 참 익숙한 이야기지.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어떤 문장이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사랑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 만남을 기다리는 것도 맞고, 네 다음 편지를 기다리는 것도 맞고, 어쩌면 우리가 이 나이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이 기적 같은 시간을 기다려온 것인지도 몰라.


책은 따로 싸서, 이 편지와 함께 보낼게. 천천히 읽어.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책이야.



퇴임식 이야기를 하다가, 편지가 길어졌다.


수진아, 나는 오늘도 네 생각을 했어. 퇴임식장에서도, 집에 와서 소주를 마실 때도, 동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도. 그런데 그 생각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아. 오히려 따뜻해. 네가 내 곁에 없는데도, 네가 점점 내 삶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기분이야.


다음 편지 기다릴게.

추운데 건강해요.



2024년 겨울, 퇴임식 다녀온 날

준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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