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 6
수진의 편지3
준호 오빠,
책이 왔어요.
택배 상자를 열었을 때, 책 냄새가 먼저 났어요. 새 책이 아닌, 오래된 서점의 냄새. 그 냄새가 어쩐지 오빠 같았어요. 단정하고, 조용하고, 오래된.
책 사이에 끼워진 편지를 꺼내 읽다가, 나는 한동안 멍했어요. 퇴임식장에서 전화를 들었다 놓았다는 그 한 줄에서 특히. 오빠가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 그 짧은 순간이 상상이 됐어요. 소주 한 잔 앞에 두고, 전화기를 내려놓고, 대신 편지지를 꺼내는 오빠. 나는 그 선택이 참 오빠답다고 생각했어요.
고마워요. 기다려줘서.
박완서 선생님 책은 그날 밤 바로 펼쳤어요.
오빠가 밑줄 그어 보낸 문장 있잖아요. 나는 그 문장을 읽기 전에 먼저 그 문장 주변을 한참 읽었어요. 앞뒤 문맥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문장에 가닿는 속도를 늦추고 싶어서. 귀한 것은 천천히 열어야 제맛이니까요.
그리고 읽었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오빠,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50년을 사랑한 거라고. 서로를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의식하지 못한 채로 하는 기다림도 기다림이잖아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다림도, 기다림이잖아요.
그 생각을 하는데 눈물이 났어요. 슬퍼서가 아니라, 그냥. 가슴 어딘가가 오래 닫혀 있다가 환기된 것처럼, 바람이 한 줄기 통과하는 것 같아서.
아이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빠 큰아이가 목소리 변화를 눈치챘다고 했지요. 우리 애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왔어요.
큰딸이 지난주에 왔었어요. 갑자기 왔어요. 나는 마침 이 책을 읽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 오빠 편지봉투가 놓여 있었어요. 딸이 그걸 봤어요. 눈길이 닿는 게 느껴졌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치우지 않았어요. 치우면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서.
딸이 물었어요. "엄마, 편지야? 누구한테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어요. 오래전에 알던 분이라고. 청년부 시절에 알았던 분이라고.
딸의 얼굴이 잠깐 굳었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엄마, 설마 그분이랑 연락하는 거야? 아빠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3년.. 하고 나는 말했어요. 조용하게. 3년이 됐다고.
딸이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나도 더 하지 않았어요. 그냥 차를 끓였어요. 그 침묵이 한참 이어졌어요. 딸이 돌아가면서 말했어요. "엄마가 외로운 거 알아. 그런데... 조심해."
조심해. 그 말이 오래 남았어요. 걱정인지, 경계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둘 다겠지요.
오빠, 나는 그날 딸이 돌아간 뒤에 한동안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내가 무언가를 해명해야 했는지, 아니면 더 단호했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런 생각은 했어요. 나는 그 아이를 낳고, 키우고, 오래 살았어요.
그 아이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마음속 긴 시간을 몰라요. 내가 피아노 앞에서 손을 멈췄던 밤들을, 아침마다 텅 빈 옆자리를 보던 날들을.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설명이 필요 없는 건지도 모르고요.
오빠가 퇴임식에서 들은 말, 나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마지막 페이지가 기다려졌다는 말. 오빠, 그게 글쟁이에게 얼마나 큰 말인지 몰라요. 독자가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것, 그게 결국 글의 전부잖아요. 오빠는 그걸 20년 동안 해낸 사람이에요.
나는 오빠 글을 읽어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지요. 오빠가 글을 쓴다는 걸 알면서도, 50년 동안 한 번도 찾아 읽지 않았어요. 아니, 사실은 무서웠던 것 같아요. 읽으면 더 그리워질까 봐. 읽으면 잊지 못할까 봐.
이제는 읽고 싶어요. 오빠가 써온 것들을. 어떤 문장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마지막 페이지를 써온 사람인지.
한 편만 보내줄 수 있어요?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글로.
오빠,
나는 요즘 매일 아침 조금씩 일찍 일어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 눈이 그냥 일찍 떠져요. 창 너머로 날이 밝아오는 걸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시간이 요즘 제일 좋아요. 고요하고,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고. 그 시간에 오빠 생각을 해요. 오빠도 어딘가에서 이 아침을 맞고 있겠구나, 하고.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나이가 됐나 봐요. 우리.
건강해요, 오빠.
2024년 12월 겨울 아침
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