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 7
준호의 편지4
수진아,
책이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다.
네가 책 냄새를 맡으며 '오빠 같았다'고 한 그 말, 나는 그 한 줄에 마음이 다 흔들렸어. 책이 나를 닮았다니.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이 이제 와서 책 냄새에 비유되다니.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더라. 아니, 좋았어. 네게 나는 그런 존재로 남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단정하고, 조용하고, 오래된 것.
박완서 선생님 책, 그 문장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는 네 말을 읽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귀한 것은 천천히 열어야 제맛이다. 우리가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한 이 편지들도, 참 천천히 열어가고 있구나.
"사랑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네가 그 문장을 읽고 50년을 기다린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 부분에서, 나는 잠시 숨을 멈췄어. 그런 생각은 미처 못 했거든. 그런데 맞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무의식 속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다림도 기다림이라는 네 말에, 나는 그제야 알았어. 내가 아내와 살아오면서도 가끔 네 이름 석 자가 떠오르던 이유를.
그건 기다림이었어. 내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한, 아주 오래된 기다림.
아이들 이야기, 고맙다. 솔직하게 털어놔줘서.
네 딸이 "조심해"라고 말한 그 장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어. 걱정인지 경계인지 모르겠다고 했지. 나는 그게 둘 다라고 생각해. 아이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부모를 지킨다고 생각하니까. 자기들이 어릴 때 우리가 지켜줬던 것처럼, 이제는 자기들이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수진아, 나는 생각해. 우리가 아이들에게 지켜질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리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일까.
며칠 전, 둘째한테서 전화가 왔어. 미국에서. 요즘 아버지 소식이 궁금했다고 하더라. 나는 아무 일 없다고 했어. 그런데 둘째가 말하길, 형이 전화해서 아버지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 무슨 일 있냐고.
수진아, 나는 그 순간 잠깐 망설였어. 말할까. 아니면 여전히 아무 일 없다고 할까. 결국 나는 말했어. 아버지에게 오래된 친구가 생겼다고.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다고.
둘째가 한참 조용하더니, "아버지, 축하해요"라고 말했어. 나는 깜짝 놀랐어. 축하라니. 둘째가 말을 이었어. "아버지, 엄마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외로웠어요. 그런데 지금 아버지 목소리는 예전 같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수진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 기쁘면서도 미안해서. 아내한테도, 아이들한테도.
그런데 둘째는 계속 말했어. "아버지, 우리도 다 커서 각자 살아요.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해요."
나는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어.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랐더라고.
네 딸도 그럴 거야. 시간이 좀 필요할 뿐. 자기 엄마가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게 낯설고 서운한 거지. 하지만 결국은, 엄마가 외롭지 않은 게 제일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네가 내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어. 무서워서 못 읽었다는 그 말, 나는 그 마음을 알아. 나도 가끔 내 글을 다시 읽을 때면, 그때의 내가 낯설 때가 있거든. 그런데 네가 이제 읽고 싶다고 하니,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나는 보통 기고문이나 칼럼을 써왔지. 그런데 네게 보내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을 거야. 그래서 생각해낸 게 있어. 몇 년 전, 지방 생활에 대한 짧은 수필을 쓴 적이 있어. 아내가 죽고 나서 1년쯤 지났을 때였어. 너무 외로워서, 혼자 살아간다는 게 뭔지 곱씹어보고 싶어서 썼지.
그 글을 보낼게. 원고지 5매짜리 짧은 거야. 제목은 '혼자 산다는 것'이었어. 지금 다시 읽어보니 좀 우습기도 하고, 너무 무거운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그게 내가 그때 느낀 진짜였으니까.
네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내 생각을 한다는 말, 나는 그 말을 읽고 오늘 아침에 일부러 조금 일찍 일어났어.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어. 그러면서 생각했지. 지금 수진도 이렇게 커피를 마시고 있겠구나.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게 참 따뜻하다고.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서로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어.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다음 편지도 기다릴게.
추운 날씨, 건강 잘 챙겨.
2024년 겨울, 아침 커피를 마시며
준호가
동봉합니다: '혼자 산다는 것'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