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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비타 Dec 26. 2023

시작하는 것이 두려운 당신에게

인생 중반전에 할 말 있어요

매번 같은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을 세월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불교에선 세상만사가 한순간도 멈춤 없이 변화하기에 무상(無常)이라고 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한 순간에 흩어버리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는 지금 겪는 숨 가쁨도 영원하지 않다는 위안이다. 

연말 연초가 교차되는 이 시간이 오면, 한 해를 돌아보며 알 수 없는 묵직함이 가슴을 누르는 경험을 한다. 올 한 해 건강하게 잘 살아낸 것에 감사하며 고개 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년도 올 해처럼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야만 생존할 것 같은 부담감이 문 앞에 대기하는 느낌이다.


내년은 어떤 날들일까? 이미 스마트폰 캘린더에는 내년 후반까지 일정이 매 달 들어차 있다. 건강이라는 변수가 생기거나 한반도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화를 낸다거나, 기후가 예상치 못한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 난 예정대로 일을 하러 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지나갈 때 난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는 아침이다. 

50대 중반의 나이다. 32년 동안 일을 했다. 그 사이 결혼, 출산, 육아, 병치레로 남들 다 하는 인생사를 겪었고 나와 함께 사는 남자의 파산, 백수, 최저임금, 다시 도전 그리고 코로나 불황도 겪었다. 끔찍해 보이는 시간들 같지만 좋게 보면 아직까지 잘 살아냈다는 것에 한 표 준다. 

남편의 사업 실패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타인의 불행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생전 처음으로 개인회생, 파산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주변에 우연히도 그런 일을 겪은 친구의 도움으로 정신적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법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기회를 빼앗으며 최소한의 숨구멍을 남겨주어 계속 일을 하게 했다. 안 지나갈 것만 같던 시간이 지나던 그날 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갈 것을 알았다면 숨 막혀할 이유도 없었을 것을. 친구가 왜 나에게 그렇게 차분하게 절차를 설명해 주고 옆에 있어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은 가는 것이고 인생도 같이 가는 것이다.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들이 자라서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태연하게 지나갔다. 난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조금 불편한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어느덧 전문가라는 소릴 듣는다. 

굳이 끄집어 내 떠들기 전엔 나의 시간 속엔 어떤 주름도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기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기분이 묘하다. 


2024년 내 기억 속으로 들어올 시간은 어떤 것일까? 

이 시기가 되면 다이어리와 함께 자기 개발서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그렇게 맞는 말만 해대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안 들으면 이 사업이 이토록 번창하는지... 나도 끊임없이 온라인 서점을 드나들며 장바구니에 책을 담는다. 서적을 구매하니 덤으로 한 해 캘린더와 습관체크표도 주었다. 이제 다음 해까지 일주일 남겨놓고 벌써부터 벽과 책장에 새 다이어리와 스티커가 놓였다. 


100세 인생이라고 한다면 이제 중간까지 왔다. 나처럼 끊임없이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주변에선 '이제 그만 좀 쉬어!'라며 쓴소리를 해댄다. 너무 어렵고 심각한 책을 읽기에 교감신경이 날뛰어서 잠을 못 잔다는 들어보지 못한 이론을 명쾌하게 퍼붓는 사람부터, 그렇게 안달 떨어봤자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죽어도 안된다는 푸념을 공유하는 사람도 있다. 

허무주의와 비관론이 대한민국 중년의 키워드 같이 느껴진다. 


전화를 끊고 잠시 불쾌한 심정으로 거울을 봤다. 

뭐가 두려운가? 왜 그들은 경기장 밖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나를 말리는 것일까? 다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따뜻한 충고라는 말도 덧붙어가면서 말이다. 다시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오늘은 햇살이 밝다. 창문을 활짝 열어 시원한 하늘을 방 안에 들여왔다. 어젯밤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장식이 흔들린다. 


일주일 후면 숫자상의 새해가 밝는다. 짠~ 하고 새 무대의 커튼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서있는 그 자리, 익숙한 얼굴, 같은 인생의 무게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무대는 다시 시작된다. 커튼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고 관객의 얼굴이 보이고 다시 보일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익숙함이라는 무기가 힘을 보탤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이름 모를 인연이 나에게 말을 걸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 없는 이 나이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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