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어 가이드의 식사 동행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깐 스마트폰이 들썩인다.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행사 일정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드디어 일이 시작되는구나, 어디 한번 볼까?' 하며 작은 글씨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일정표와 명단을 들여다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원수와 나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부쩍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온라인 여행 예약 사이트의 한국 여행 코스는 인기 만점이라는 듣기 좋은 소식을 듣는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말은 다른 언어권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구미 영어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단군 이래로 이렇게 서양 여행객이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발 빠르게 해외 여행사들이 국내 여행사들과 계약을 맺고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미 한류로 코로나 전부터 들썩였던 K -POP과 드라마의 열풍이 더 똑똑해져 각종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색감까지 쨍한 상품들이 줄이어 소개되고, 명동의 화장품 매장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단 들어가 보는 '성지'가 되었다. 관광산업이 이렇게까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희망과 일종의 뿌듯함도 생겼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길어지다 보니 때로는 나도 모르게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꺼내다 스스로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한다. 어학연수로 단련한 유창한 어학 실력과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언제라도 도움닫기라도 할 듯한 자세를 취하는 후배 가이드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K- 가이드들의 이런 긍정적이고 기분 좋은 열정이 있다는 것에 안심되기도 한다. 솔직한 심정이다.
다시 일정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가이드 업무 중에 유난히 신경 곤두서는 부분이 식사다.
동양권에선 웬만하면 다 잘 먹고, 예전 힘들게 살았던 시절에는 지금 흔하게 보는 '식품 알레르기'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시절 뭔가를 먹고 기도가 부어 병원에 갔더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똑같은 식사를 반복했을 수도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다'라는 말과 같다. 개인의 취향과 권리가 존중되는 시대가 되었고, 사소한 요구사항이라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을 때 책임과 벌칙이 엄격해졌다. 특히 '의학적 소견'이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조심스럽다. 일반적인 관광객의 경우, 미리 여행사에서 현지 상황에 따른 불편함과 예외 사항을 숙지하라며 동의를 요구하기에 대부분의 관광객을 본인이 해외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행사지시에 적혀있는 주의 사항에 따라 때로는 채식주의자, 종교적 이유로 소고기, 돼지고기를 구별해야 하는 사람, 그냥 생선이 싫은 사람등을 꼼꼼히 파악한다. 일정에 맞춰 외국인 관광객이 좋아하고 편의성을 갖춘 식당을 일일이 예약한다. 완벽하게 예약이 끝나고 메뉴도 최종적으로 정해졌지만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기다린다.
한국인이라면 4인용 테이블에 앉아 가운데 불판에서 뭔가를 끓이거나 구워 다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반찬은 4명이 먹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작은 접시에 담겨있고, 보글거리는 된장찌개도 마찬가지다. 가이드는 미리 설명한다. 한국음식의 특성과 나누어 먹는 문화지만 요즘은 각자 앞접시가 놓여있으니 작은 국자나 집게로 나누어 먹으시고 모자라는 음식은 언제든지 손을 들면 추가로 가져다준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이렇게 일정이 진행될수록 식당을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어느새 밥과 반찬에 익숙해지지만 한 가지 불편해지는 것은 바로 '타인과 함께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일행이 짝이 맞아 함께 앉는다면 좋겠지만 두 명이거나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누군가와 동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나는 오랜 가이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다.
1. 언제나 익숙한 사람과 함께 : 안정감을 원하는 마음
여행지는기본적으로 낯설다. 새로운 환경과 생소한 음식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익숙함은 안정감을 준다. 특히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앉게 된다면 식사 내내 불편함을 느낄 수 있기에, 여행 내내 같은 사람과 앉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단체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얼른자신들의 자리를 맡고, 함께 앉고 싶은 사람을 부른다.
2.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뜻밖의 인연을 기대하는 마음
비행기를 타고 내 나라를 떠나는 순간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색적인 풍경, 익숙하지 않은 냄새, 그리고 여행 전에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 특히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편안한 미소를 짓는 타인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뜻밖의 특별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앉아야 할 경우도 있지만, 용기 있는 몇몇은 일부러 관심이 가는 사람 옆에 가서 합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들의 대화는 대개 유쾌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행이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3. 조용히 혼자 식사하고 싶은 사람: 고독을 즐기는 자유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현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각자 앉아도 될 경우 어떤 사람은 조용히 혼자 식사하고 싶어 한다. 나는 이러한 개인의 선호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발적으로 혼자 앉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다분히 문제 소지가 클 때가 있다.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만, 단체 여행에서 혼자 식사하기란사실상 쉽지 않다. 이럴 경우 가이드인 내가 동석해 주며 그들의 불편함을 덜어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나에게는 식사가 아닌 일이 되지만 어쩔수 없다.
4. 누구라도 좋으니 가이드가 정해 주길 바라는 사람 : 결정을 피하고 싶은 피로감
하루에도 수백만 번 결정해야 하는 뇌는 '피곤한 결정'을 싫어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모든 것이 낯선 외국에선 작은 결정 하나도 피로로 다가온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중식, 석식 먹어야 하는데 자리 찾아서 눈치 보는 것이 그저 피곤한 사람들이다. 딱히 까탈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친밀성이 높은 사람들도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부류라고 할까.
가이드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손님은 누가 뭐래도 '그저 잘 먹는 사람'이다. 가이드는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행복한 얼굴이길 바란다. 한자어로 식구(食口)는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고, 곧 가족으로 비유된다. 낯선 나라에서 색다른 냄새가 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 그것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선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음식은 단지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맛은 기억'이라고 했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한국에서 맛보는 음식에서 그들이 가장 맛있고 행복한 기억을 가져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오늘도 사람들의 식탁 위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들을 조용히 지켜본다.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저장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