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마지막에는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 평소보다 푹 잔 것 같은 느낌, 상쾌한 느낌으로 깨자 불안한 마음으로 시계를 봤더니 늦잠이었다. 덕분에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허둥지둥 준비를 마치고 집 밖을 나섰다. 지하철을 놓치는 순간 회사 지각 확정이기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다. 그러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아픈 것보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죽을 만큼 쪽팔렸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역까지 다시 뛰었더니 지하철은 내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더라.
결국, 지각해 버렸다. 여기까지만 운이 없었으면 괜찮았을 거다.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사의 부름에 갔더니 이번엔 밤을 새워 제출한 보고서에 오탈자 투성이라더라. 이걸 보고서라고 써온 거냐는 따끔한 지적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떨구고 자리로 돌아왔다. 밤새워 만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아 허탈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보고서와 한참을 싸우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입맛은 없었으나 지금 먹어두지 않으면 퇴근 전까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구내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몇 술 떴는데, 속은 더 불편해졌다. 괜히 먹은 것 같다.
식당을 나와 카페인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누군가와 쿵 하고 부딪혔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는 그대로 새로 산 하얀 블라우스에 진한 갈색 얼룩을 남겼다. 와··· 진짜 이럴 수 있나? 진짜 울고 싶었다.
겨우겨우 퇴근 시간이 되었다. 축 처진 어깨를 겨우 이끌고 회사 문을 나서는데, 이젠 하늘까지 나를 괴롭혔다. 분명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는데···. 되는 일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오늘 나한테 왜 이래? 속상하고, 억울하고, 지친 마음에 결국 회사 앞에 쭈그려 앉아 눈에도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왜 그러고 있어”
그때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흐릿한 시야 너머로 우산을 쓴 남자친구가 있었다. 훌쩍이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내 모습을 보고 대충 오늘 힘들었음을 짐작했는지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꼭 끌어안아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해줄게. 뭐 먹고 싶어?”
그의 따스한 품과 다정한 말에 그만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래, 그래. 하며 나를 토닥여줬다. 그리고 오늘 하루,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가 엄마한테 이르듯 그에게 털어놨다. 그는 나의 억울한 일들 하나하나에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줬다.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오늘 하루의 모든 불운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되는 일 없던 최악의 하루가 그 덕분에 마지막에는 되는 날로 바뀌었다. 세상의 모든 불운을 혼자 다 짊어진 것 같던 오늘, 그의 존재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줬다.
살다 보면 되는 일이 없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의 끝에서 나의 옆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