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희망은 그래도, 엄마

2장 1. '고요'가 주파수

by 엄도경

『언제나 에베레스트 산비탈의 살얼음을 걷듯이 조심했었다.

내 다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만 주의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나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걸

크레바스로 진공청소기의 쓰레기처럼 빨려 들 때 깨달았다.

배부른 빌딩 숲에서 사라지는 건 어차피 버릴 때가 되어서 폐기되는 것.

매번 지기만 하는 사람들로 차려진 제철 음식은 감칠맛이 일미인데, 내가 나를 갖다 바쳤으니 나조차 나를 위해 울 수 없었다.


중간중간 툭툭 튀어나온 모서리를 스칠 때

움푹움푹 살점을 찢는 동물의 울부짖음,

내 안에 그런 소리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깊은 동굴의 효과음은 계속 증폭되어서 귓바퀴를 때리고 몸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스산한 지하실 차가운 수술대에 마취 없이 장기를 적출당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자처럼

시곗바늘도 영원히 얼어버렸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긴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상쾌했습니다.

대낮인데도 별이 반짝이는 곳

내가 떨어진 곳은 겨우 위로만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고치 방이었지요.

느릿느릿 게으른 기지개를 크게 켜보면 솜사탕처럼 늘어나다가 다시 오므리면 같이 작아지는 하얀 구름,

한낮에는 떼를 지어 노닥노닥 그렇게 한참을 놀다 가더니

밤에는 모아둔 햇살을 칠흑에 살살 풀어서 푸른 거품 별빛의 바다가 펼쳐지는 곳.

처음으로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은지 알았던 그 밤의 위로는

죽어도 잊지 못할 풍경이었어요.


총알은 다 떨어지고 보급도 받을 수 없는 적진에서,

장렬하게 죽을지언정 초라하게 지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는 혈기가

일부러 발을 헛디뎌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

긴 겨울에 갇혔던 건데

어떻게 이렇게 따뜻해질 수 있는지..... 삶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보물상자처럼 오묘했어요.



꿈처럼 한 번 날아보지도 못했으니 이번 생을 망쳤다는 자책감에다

나 같은 루저를 받아줄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는 옹졸함으로 무거웠던 정적이

방울방울 마른 풍경소리로 맑게 은하수로 흩어질 때 시야가 열리고

난생처음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래전에 말랐다고 전해져 오던 흉선(胸線)이

우물처럼 졸졸.

가슴샘은

어린 날 기어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다락방처럼 아늑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별을 보았을 뿐이에요. 아이처럼 그저 계속 보았을 뿐인데

별이, 별 너머의 세계를 불러다 줄 줄이야.

봄이, 다만 지그시 봄이 겨울 너머의 봄을 불러다 줄 줄이야.

'응시의 힘'이.




삶은

하루하루를 곱게, 그것도 평생을 이어 맞춰야 종결되는 단 한 장의 그림 같은 것.

세상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루해 낮 동안만 분주한 하루살이로 배를 채우는 강자(强者)들이 좌지우지하는 곳이었어요.

그러므로 필요한 건 '고요'



쾌적 거리를 가져야 했어요.

숲 속의 나무처럼 대로변 가로수처럼.

삶의 현장에서 매번 내가 타자(打者)인 것은 아니지만

실제 상황에서의 마지막 대응자는 항상 나인 데다가,

마지막 순간 내 운명의 진실도 나 혼자 대면해야 해서

고독이 필요했습니다.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했어요.

가족들이라고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안달이 나서 자기들 삶의 기준을 들이대면서 밥이 되고 돈이 되는 일이 아니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무시하곤 했거든요.

세상이 뭔지, 삶이 뭔지, 내가 누군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냥 살던 대로 살게 되는,

이기고도 결국에는 패배하는 강자들에 치여 힘들게 얻은 사람의 생명을 허비할 수 있어서

외로워야 했던 거예요.



외롭고 고독한 고요 속에서

뿌리처럼 깊숙이 감춰진 맥락을 더듬더듬 찾아가면

지구, 역사, 사람, 풀, 구름, 사막의 모래바람…… 세상의 모든 것은 내밀한 연관성으로 엮여있음에 다시 눈을 뜨고

상황에 휩쓸리고 현실의 중압감에 좌절한 영혼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저리면 몸이,

'아해'가 반응을 해왔어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하나씩 하나씩 실체를 보여주기 시작했지요.

우주적 관점에서 보여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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