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제안할 수 있었지만, 숫자는 설득하지 못했던 디자이너의 고백
당시 나는 강남의 4성급 호텔에서 브랜드의 시각적 가치를 책임지던 디자이너였다. 어느 날 대표님으로부터 중요한 인쇄물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기준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5성급 호텔 수준의 압도적인 퀄리티.'
최고급 수입지, 은은하게 빛나는 형압 가공,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질감까지. 나는 우리 호텔이 나아가야 할 격에 맞는 최고의 결과물을 설계했다. 하지만 최종 결재 라인에서 내 기획은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왜 이렇게 비싼 종이를 써야 하지?"
"다른 5성급 호텔들처럼 최고급으로 가야 우리 브랜드의 자부심이 생기니까요."
내 답변은 늘 '당위성'에 머물렀다. 고급스러움이 왜 필요한지, 이것이 고객에게 어떤 심미적 만족을 주는지 수차례 설명했지만 대표님의 다음 질문에 나는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종이 한 장에 들인 추가 비용이 어떻게 투자 이상의 수익으로 돌아오나?"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나는 디자인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대표님은 비즈니스의 '생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제안했던 최고급 사양은 예산에 맞춰 줄줄이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잉크의 광택이 사라지고 종이의 두께가 얇아질 때마다 내 자존심도 함께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그 쓰라린 경험을 뒤로하고 마케팅 회사로 이직했다.
디자인의 가치를 '감각'이 아닌 '숫자'로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마케팅과 브랜딩을 공부한 지금,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대표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 호텔의 마케팅 비용을 환산했을 때, 인당 애퀴지션 과 리텐션 비용은 약 얼마 얼마에 가깝습니다.
즉, 이 정도 수준의 디자인 투자는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신규 고객 유치 비용을 수 배 이상 절감하고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익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SNS를 통한 자발적 바이럴까지 고려한다면, 지금의 투자는 3배 이상의 수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의 실패는 나를 단순한 디자이너에서 전략적 기획자로 성장시킨 가장 값진 수업료였다. 당시 내가 디자인의 당위성을 설명하지 못해 사양을 낮춰야 했던 건, 결제권자의 안목 탓이 아니라 내 논리의 부재였다.
많은 실무자가 자신의 기획이 거절당할 때 상사를 탓하곤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자문해봐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미학이 기업의 이익으로 어떻게 치환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이후 나는 프런트, 하우스키핑, 세일즈 등 호텔의 전 부서를 기획 관리하고 의사결정하는 위치까지 올랐다.
호텔 운영의 전반을 꿰뚫게 되었지만, 내부의 시각만으로는 '수익으로 직결되는 마케팅'을 체득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호텔을 떠나 마케팅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결국 디자인을 비즈니스의 언어로 번역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