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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Oct 18. 2020

이쯤에서 해보는 중간 평가

제2 언어로 [수어]를 선택했다

  어느덧 수어 초급반도 중간쯤 왔다.


 코로나 19 때문에 시작부터 온라인 수업을 했는데 다음 주면 오프라인 수업으로 전환된다. 아직 종식된 것이 아녀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을 들어야겠지만 ‘비수지가 안 보일 텐데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니, 일상에 수어가 깊숙하게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구나 싶다. 목소리가 언어와 표현의 전부가 아니게 된 것을 이렇게 실감한다.


 나름대로 중간 평가를 해보자면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지만 제법 달라진 것이 있다.


 하나. 가지고 있는 여러 정체성 중 ‘청인’이라는 정체성이 추가됐다. 이전에는 오디즘을 당연하게 주류의 것으로 여기며 나는 정상인, (저 이 보다는 내가 낫다는 우월성을 포함한) 비장애인으로 선을 그었다. 지금은 음성 언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수어를 배우고 있는 청인으로 스스로를 정체화 한다.


 둘. 평상시 대화를 할 때 비수지(표정)가 풍부해졌다. 무표정이 기본 값이었던 지난날에서 차츰차츰 탈피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비수지를 사용하려는 것은 아녔는데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차리고서 역으로 알려줬다. 요즘 부쩍 표정이 다양해져서 대화할 때 좋고, 싫음 등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며. 자아의 가면을 단단하게 두르고 지내는 회사원의 입장에서는 마냥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로 만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웠는데, 조금 더 편히 다가갈 수 있다고 하니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해본다.


 셋. 불편함이나 차별에 대해 민감성을 가지게 됐다. 더디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도 한다. 보이는 ARS가 왜 생겨났을까, 누가 사용할까 생각해보게 됐다. 보이는 ARS로 해결할 수 없으면 결국 상담원과 연결해 통화를 하게 되는데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영상통화 서비스도 제공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몇 번 손가락 톡 톡 톡 두드려 카카오 택시를 부를 수 있다지만 심야시간이나 택시가 잘 오지 않는 곳은 지역별 ‘콜’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다. 똑같은 이용자, 승객인데 누군가는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다른 이들이 부른 콜택시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역별로 ‘문자’ 택시 서비스도 제공해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봤다.


 또,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상영관이 또 다른 차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배리어 프리 상영관 설치의 취지는 좋지만 시간대가 한정적이고 상영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어떤 종류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과 함께 영화를 보기 어려우며, 비장애인도 배리어 프리 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지만 해설 자막이 다소 눈에 거슬리고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관의 구분은 결국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확고한 분리로 이어진다. 일반 상영관과 배리어 프리 상영관을 구분하지 말고 모든 상영관에서 말 그대로 배리어 프리를 가능하게끔 하면 되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이 영화를 같이 볼 때 좌석에 얹을 수 있는 시트를 제공하는 것처럼 시청각을 도구들을 제공하면 되는 것 아닌지. 기술로는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선택과 비용의 문제만 남아있을 뿐.


 넷.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 더 늘어난 만큼 감각도 확장됐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제2 언어로 선택했다면 음성이나 문자만이 추가됐겠지만, 수어를 배우며 ‘시각’이라는 감각이 부쩍 늘었다.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어려운 수어. 빠르게 물 흐르듯 지나가는 수어를 치열하게 보다 보니 관찰력이나 집중력도 덩달아 늘었다. 역동적으로 보는 방법을 알게 됐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이 지날 때마다 내 세계도 같이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진다. 초급반의 남은 절반도 기대된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지만 중급반은, 고급반은 어떨지. 회화반을 가게 되면 또 어떨지 설렌다.


 내 눈도 보석이 되는 그날까지, 느리지만 꾸준하게.

(왼쪽) 눈 / (오른쪽)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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