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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반짝 Feb 05. 2018

책과 관련된 에세이!!(주의: 사고 싶은 책이 많아짐)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에 관한 에세이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고, 어떻게 책을 소장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내 곁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책을 통해 또 다른 동질감과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게 바로 책에 관한 에세이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 중에서 좋았던 책들을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사고 싶어지는 책이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책들을 읽으면서 책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1.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 다치바나 다카시


책의 두께에 기가 질릴 법도 한데 저는 이상하게 흥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구경할 수 있구나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책의 중간중간 사진이 몰아서 실려 있는 곳을 먼저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사진 속의 책등이 외국어라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빌딩을 만들어서 보관할 정도라면 없는 책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 20만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는 일명 고양이 빌딩.



처음에는 단순히 저자의 책 목록과 그에 관한 소소한 에피소드들만 펼쳐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서재 구석구석을 누빌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되고 아예 책이 따로 써지는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놀랐습니다. 저자를 부르는 수식어는 많지만 '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이란 뜻의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꼭 맞는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모르는 분야가 없어 보였습니다.


저자는 어떤 분야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하면 자료조사를 위해 어떨 땐 약 100권의 책을 읽고 새로운 책을 써내는데 그렇게 책을 쓴다는 것도, 그렇게 모은 자료가 있는 서가를 통째로 옮겨서 작업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서가를 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면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서가라는 것은 재미있는 물건이다. 하나하나의 블록이 특정한 생각하에 형성되어 있다는 게 잘 드러난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블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때그때의 생각에 이끌려서 일군의 서적을 모은 결과가 각각의 블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가 전혀 관심이 없거나, 아예 알지 못하거나, 궁금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던 분야까지도 쉽게 설명해주어서 책을 읽다 말고 온라인 서점에서 계속 책을 검색했습니다. 대부분 국내에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종종 관련 도서를 찾아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과학, 철학, 역사에 관한 책들임에도 저자가 이야기해주면 단박에 재미난 책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열심히 리스트를 만들었고 그 책들을 하나씩 만나보며 저자가 넓혀준 세계에 조금이나마 들어가 보려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하다 싶으면 성경책도 꺼내서 확인해 보고 자료도 검색해보고 관련 책을 발견하면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그야말로 책을 읽는 내내 바빴습니다. 저에겐 나름대로 다양한 동기가 부여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김영하 작가가 『읽다』에서 언급한 ‘책의 우주’가 꼭 이곳 같았습니다. 고양이빌딩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책의 우주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 맘껏 유영하게 됩니다. 저자는 끝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맘껏 누비며 자신의 세계를 타인에게 거리낌 없이 안내해 주니까요.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를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습득하고, 분석하고, 소화시켜 ‘지知의 세계’를 아무런 편견 없이 펼쳐주어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책 속의 책을 넘어, 한 개인의 소유물을 넘어, 책 속에 담긴 정보와 메시지를 넘어, 광활한 지식의 세계를 여행하고 온 기분이었습니다.  




2. 읽다 - 김영하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제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오랜 시간 더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운명적으로 이 책을 읽을 즈음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이 몰려올 때였습니다. 분명 재미있어서 읽고 있음에도, 이렇게 소설만 읽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반항심 같은 회의감이었습니다.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103쪽)’란 말처럼 그 기분좋은 헤맴을 위해 계속 책을 사들이고, 뒤적이고, 읽고, 중단하고, 다시 읽는 행위를 하고 있음을 깨닫자 의미 없었던 시간들이 그제야 인정받는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독서의 목적 따위는 그에 비하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라든지 ‘어떤 소설은 우리가 읽든 말든 저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라는 문장 앞에서 지금껏 소설을 읽어왔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이러이러한 소설들을 읽어왔다가 아니라, 나는 그 소설들을 읽는 사이에 어떻게 변했는지 그 시간들이 의미한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칼비노는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말합니다. (...)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고전이란 처음 읽으면서도 ‘다시’ 읽는다고 ‘변명’을 하게 되는 책이지만, 처음 읽는데도 어쩐지 ‘다시’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11쪽)



그리고 문득, 꾸준히 고전 읽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05쪽)’란 문장을 조합해 블로그에 ‘책의 우주, 그곳의 우리’란 폴더를 만들어 고전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책 읽는 기간은 정해졌지만 완독보다는 같은 시간에, 함께, 책의 우주를 유영해보자는 의미의 고전 읽기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책 속에 언급된 『이방인』과『롤리타』를 선정해 블로그 이웃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이방인』은 너무 어릴 때 읽어서 꼭 재독해 싶은 책이었고 『롤리타』는 정말 읽고 싶었지만 소설의 소재 때문에 망설였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읽으니 읽으면서 보지 못했던 시선이라던지, 완독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다독임에 용기를 얻어 완독한다던지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책의 우주에 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지금은 개인사정으로 휴먼 상태지만 언젠가 다시 부활시킬 생각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수많은 ‘나’가 분열했습니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그 분열을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든든했던 감정은 외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오롯이 나 자신과 소설 속의 인물과의 고독한 시간일 때가 많아서인지, 그런 시간을 익히 알고 더 넓은 세계를 알려주는 저자의 너그러움이 표현할 수 없는 감정까지 건드려 위로해 준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때론 숨 막힐 때도 있지만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은 그저 고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안에서 헤매는 즐거움을 알고, 나 혼자서 그런 세계를 유영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책의 우주를 만끽할 이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3.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이 책은 2001년 8월부터 3년간 <조선일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라는 북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입니다. 신문사 측은' '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하고 도서관이나 책방으로 뛰어가게 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는데, 그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학 교수로서 비평적으로 글을 다루기보다,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내 삶이 얼마나 더욱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이 우리 삶 속에 얼마나 진득하게 녹아 있는지, 문학이 그런 삶 속에서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밀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학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들이 얽혀 들어가는 것을 보며 문학이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제대로 느낀 책이었습니다. 




저자는 '문학의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된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작가들이 사랑에 관해 전달한 메시지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논어에 나오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란 구절을 언급하며 '사는 게 힘들다고, 왜 날 못살게 구느냐고 그렇게 보란듯이 죽어 버리면,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사랑할 몫도 조금씩 앗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늘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내 삶은 왜 이 모양인지 불평만 했는데, 나의 삶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사랑하지도 못했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문학의 이면을 제대로 캐내지 못한 부끄러움이 일었습니다.

지금껏 저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고전이든 현대문학이든 절대로 삶과 따로 결부시켜 동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음을, 또한 도피한다고 도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깊이로 더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이 주는 기쁨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과 역경에 맞설 수 있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한 서모셋 몸의 말처럼 저의 독서는 도피성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귀중한 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처럼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라고 생각하자 문학에 대한 탐독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 저는 무조건 많이 읽기에만 급급하고 있었습니다. 한 권의 작품을 깊이 읽고, 삶과 접목시키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살다간 이들의 삶을 통해 더 이상 문학을 도피하기 위한 대처방법으로 대하지 않기로 다짐도 하게 되었고요.




이렇게 세 권의 책을 정리하고 보니 책의 매력에 빠진 저자들의 메시지를 단번에 받은 느낌이 듭니다. 

책에 관한 에세이를 읽다 보면 특별과외를 받는 기분이 드는 건 저만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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