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되고 안정되고 오래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by 안녕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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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을 세심하게 계획한다. 우리 모두는 블록을 쌓는 어린아이와 같다. 블록조각에 또 다른 조각을 조심조심 쌓아가는 어린아이들. 일, 집, 가족, 우리가 소비하는 온갖 잡동사니들. 우리는 블록을 높이 쌓아가며 오래도록 안정된 구조물이 되길 갈망한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고정되고 안정되고 오래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지진이나 대홍수가 일어나야만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 건물에 깔려 죽는 건 아니다. 그저 작은 균열 하나로도 건물이 붕괴되고, 사람의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다. (295쪽)


불안감. 내가 정말 마음에 드는 곳에서 일을 했을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드는 생각이었다. 내 책상에 앉자마자 불안감을 꾹 누르기 위해 늘 기도를 했다. 이곳에서 나의 잠재력이 발휘되길. 불안감이 날 집어 삼키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길. 그러나 2년 만에 퇴사를 하고 말았다. 2년 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 버린 날들이었다.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쉬움과 미련, 후련함이 교차하는 감정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 다녔다.


내가 정말 원하는 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래오래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퇴사는 먼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모든 과정을 견뎠다. 조짐은 이미 드러났지만 퇴사가 단 하루 만에 결정되었던 당시를 떠올려 보니 이 책의 주인공 네드 앨런의 심정이 조금은 공감이 갔다. 네드는 컴퓨터잡지의 잘 나가는 광고지국장이었다. 치열한 광고계에서 실적을 위해 매일매일 싸우면서도 세일즈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잡지의 발행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온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결정된 사안이라며 비밀에 부치지 않으면 승진은 없다는 다짐에 약속까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해고와 배신자라는 낙인이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그는 실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인수합병 과정에서 자신이 희생양이 된 것을 모른 채 직장동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뿐만 아니라 상사를 폭행했기 때문에 그 바닥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작은 균열 하나로도 건물이 붕괴되고, 사람의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문장이 그에게 너무 잘 어울릴 만큼 점점 쌓여가는 빚, 냉랭해지는 부부관계,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 그는 나락으로 떨어져 소생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네드 앨런이 어떻게 추락하게 되었는지 너무도 상세하게 나와 있었기에 그의 문제가 나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져 우울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어려움, 그 뒤에 감추어진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들, 타인에게 비춰지는 이미지 들이 심히 공감이 갔다. 내가 만약 네드였다면 그 상황에서 당장 도망쳐 버렸을 것이다. 다시 일을 하겠다는 용기는커녕 집안에만 틀어박혀 전전긍긍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지금껏 누려온 생활을 추스르고 유지하려면 일을 해야 했다. 아내에게 마냥 기댈 수 없었고 당장 일하지 않으면 파산을 면치 못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뻗쳐오면 앞뒤 재어보지 않고 덥석 잡는다. 나 또한 네드가 온갖 고생을 하고 하룻밤의 실수가 더 큰 계기가 되어 집에서 쫓겨났을 때 친구 제리의 등장이 구원자 같다고 생각했다. 제리가 제안한 사모펀드 세일즈가 새로운 발판이 되어 그가 잃어버린 것을 하나씩 찾아가며 행복하게 마무리 될 거라 생각했다. 그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차근차근 밟고 올라서면 아내도 다시 그에게 마음을 열 것이고 그가 진 빚도 갚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이(?)하게 흘러간다면 이 책이 왜 이렇게 두툼한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네드는 더 심하게 일들이 꼬여 버린다. 신종 세일즈에 발을 디딘 것이 아니라 어둠의 돈을 세탁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잠시, 전 직장에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피터슨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고 아내와의 별거, 동료의 죽음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엉켜버린 실타래가 풀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네드는 함정에 빠졌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악화된 상황을 역이용하며 기지를 발휘해 그 모든 상황에서 빠져나온다. 아내의 마음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여준 최악의 사태 속에서 헤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네드 앨런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초반에서 이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세세하게 알려주는 주는지 슬슬 의문을 갖기 시작할 때 네드는 함정에 빠졌고 그때부터 그의 행보를 알아가는 데 탄력이 붙었다. 숨 가쁘게 그 모든 이야기를 읽고 나서 되돌아보니 이 작품이 1998년 작품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 IMF가 터졌던 시기였고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어서인지 이 소설의 배경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사람이 회사의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일. 입에 풀칠하기 바빠 인권을 생각할 수 없는 현실. 타인의 부당한 처사를 눈 뜨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일들이 현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네드의 탈출이 다행으로 여겨지면서도 마냥 안도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각박하고 냉정한 사회생활에서 비켜나 있지만 가장이라는 이유로 매일 정글로 나가야 하는 남편, 앞으로 그런 사회에 내보내야 할 내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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