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은교>
내가 당면한 사랑이 <은교>의 이적요 시인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용기가 있을까? 평생 시인으로 존경받아 왔는데, 한 소녀를 사랑했고 자신의 애제자를 죽였노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사랑의 힘인지, 아니면 인간이 지닌 양심인지 조금은 헷갈렸으나 이적요 시인과 그의 제자 서지우가 남긴 글로 모든 실체가 밝혀지고 있었다. 이적요 시인도 서지우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대학생이 된 은교와 이적요 시인의 유언을 담당한 변호사로 인해 비밀은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변호사에게는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가 있었고 은교에게는 서지우가 남긴 디스켓이 있었다. 두 내용이 병행해 가면서 서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모든 과정을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시인으로 존경받는 이적요 시인은 열일곱 은교를 사랑했다. 우연히 자신의 집 마당의 벤치에서 자고 있는 은교를 발견할 때부터 그는 은교를 사랑했고, 청소 아르바이트로 자주 마주치면서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에는 자신이 사랑한 소녀 한은교에 대한 고백이 가득했고, 노트의 시작에서 밝혔던 것처럼 서지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 어떻게 그를 죽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내면의 변화가 그대로 전해졌다. 서지우는 자신의 제자였지만, 그가 발표한 작품은 모두 이적요 시인의 글이고 문학적 소양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지우가 쓴 관능적이고 충격적인 소설이 이적요 시인의 글이라는 사실만 밝혀져도 충격적인 마당에, 은교를 사랑하고 제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사후 1년 뒤에 공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은교에 대한 사랑, 은교를 향한 애정, 은교에 대한 추억을 담뿍 담는 글들을 썼다. 늘 상황에 적절한 시와 함께 써 내려간 글을 읽고 있노라면 시인에게 은교는 정말 깊이 사랑하는 존재,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랑에 나이와 상황이 좀 더 나았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았지만, 이적요 시인이 당면한 현재의 상황에 은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이 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라고 쓴 앙드레의 시를 빌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듯, 이적요 시인의 글과 시는 잘 어우러져 은교에 대한 사랑, 서지우에 대한 분노, 은교에 대한 추억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반면 서지우의 일기 같은 내용에는 스승 이적요 시인과 은교의 사이에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는 순수한 열정으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였으나, 재능이 없음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스승의 글로 발표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스승이 깊이 사랑하는 은교를 맘대로 농락했으며, 문학적 지위의 강압을 못 이겨 스승이 써 놓은 글을 훔쳐 발표하기도 한다. 서지우의 삶도 결코 평탄하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고, 문학 세계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그가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스승보다 조금 젊다는 이유로 은교를 제멋대로 농락하고, 명예와 물질만 좇는 그의 모습이 한심해 보일 때도 많았다. 스승이 감히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아이 은교, 시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감히 발표할 수 없었던 농염한 소설들이 이적요 시인을 대신 말해주면서도 서지우의 허울을 그대로 드려내고 있었다.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의 노트를 번갈아 읽다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트는 은교에 의해 운명이 갈린다. 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어 두 사람의 내면을 채운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적요 시인의 은교에 대한 마음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순수하고 깊었으나, 서지우를 우아하게 살인하려고 했던 점과 그의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 속에 감추어진 문학적 위치가 위선으로 보이기도 했다. 서지우는 스승에 대한 애틋함, 문학에 대한 갈망이 기특하긴 했으나 은교를 함부로 대하고 스승을 기만하고 경쟁상대로 삼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생각한 것들은 용서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이적요 시인은 서지우를 교묘히 살해하려 했고, 서지우는 이적요 시인의 뜻을 알아차리고 대처하긴 했으나 목숨을 건지진 못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스승이 자신을 버렸다는 슬픔으로 인한 눈물이라고 말한 은교의 말처럼, 죽음의 결과보다 과정에서 이미 그를 이해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적요 시인이 사후 1년 뒤에 발표하라고 한 사실들 모두가 이 소설 안에서 펼쳐졌지만, 그것은 결코 알려져서 득이 되지 못할 내용이었다. 이적요 시인의 양심 고백이 그를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남겨진 은교에겐 충격이고 상처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은교는 이적요 시인의 죽음보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시인의 마음을 알게 되어 상심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받는다는 사실도,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한 발짝도 건너오지 못한 이적요에 대한 마음이 터져 바보 같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이적요의 노트도 서지우의 글도 모두 그녀로 인해 상실되고 만다.
한바탕 꿈을 꾼 듯 폭풍처럼 몰아친 그의 글 앞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읽었는지 멍해질 정도로 격렬한 글이었다. 은교를 사랑한 이적요 시인의 열정 같은 마음도 느껴졌고, 열일곱 소녀의 천진함도, 어느 것에도 정착하지 못한 서지우의 방황과 잘못됨도 모두 낱낱이 보게 되었다. 이적요 시인의 은교를 향한 마음을 온전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순히 나이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인의 사랑은 깊었으나 외롭고 쓸쓸했으며, 모든 것을 안고 가야할 정도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 모든 것을 은교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인이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픔이 가득한 그녀였기에, 애잔함만 남기고 떠난 시인과 남겨진 은교가 한 없이 마음 아프게 다가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