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세풀베다 <외면>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과 에세이를 접하면서 그의 풍부한 경험과 시각의 넓힘을 경험한 터라, <외면>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그의 작품을 한 권씩 대할 때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기분이 든다. 그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동선이 길어 그로인한 낯선 지명이 눈을 찌를 때가 있다. 지명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에서도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흐름을 방해받지 않도록 이야기를 중점으로 읽어나갔다. 그렇다보니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인물과 지리적 위치가 딴 세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자의 작품에서 동양권의 이야기가 아직은 미진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동양권에 속해 있는 나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정서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저자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세상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들의 삶이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정서에 부합되지 않고, 딴 세상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인간군상이 모두 같기를 바랄 수 없으므로, 오히려 신선한 매력을 느껴가고 있었다. <외면>이라는 제목 아래 묶인 단편들은 제목에 걸맞으면서도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 자신, 흐르는 시간, 사랑을 외면하다는 소주제 안에는 외면당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외면당했다고 해서 관심 밖으로 밀려 났다는 정의로 가둘 수 없었다. 어떠한 단편들은 완성도와 이야기의 흐름에 신경 쓰며 읽다보니 '외면'이라는 느낌을 끌어 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낯섦이 가중된 '외면'의 이야기에 소주제를 대입할 때는 각각 다르게 이야기가 다가오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람을 외면하다'라는 제목으로 묶인 단편들이었다. 외면이라는 의미가 가장 잘 와 닿았던 단편들이기도 했고,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이 신선하고 독특했다. 첫사랑의 집이 찍힌 사진을 통해 회고하는 이야기, 안개에 갇혀 탈선한 기차, 기차 안에서 만난 착한 죄수 등 스토리의 탄탄함과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실린 또 다른 외면들에 대해서는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읽다가 손에서 놓은 뒤, 이미 흐름이 끊긴 다음에 집어든 탓이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과 단편들을 부합할 수 없었고, 더 생경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저자가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발표하기 전에 쓴 단편들을 모은 책이라, 저자 또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애독자들도 기다렸던 만큼 신선함을 가지고 대했었다. 그랬기에 잠시 손에서 놓아버린 틈에 흐름이 깨져버려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뒤로 갈수록 실험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독특한 내용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런 흩어짐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실수와 운명의 거슬림, 철저한 배제 속에 속한 사람들과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지 못하고, 조금 익숙해 졌다는 자만이 겹쳐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다. 그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저자의 글 속에 담긴 정서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할거라 생각한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소설을 플롯만으로 읽어낼 수 없고, 의미로 판가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등장시켜 현실과 낭만을 오가며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삶의 깊숙이 들어갈수록 헤맬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현대인의 문제점을 피할 수 있을 거라며 아무런 방어 없이 책을 펼친 것도 한 몫 했다. 왜 라틴아메리카 이야기라고 해서, 저자가 오래전에 쓴 이야기라고 해서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버린 것일까. 인간의 본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식이 변해갈지는 몰라도 기본 바탕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셈이다.
이제 국내에 번역된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두 권만 읽으면 그의 작품을 모두 만나게 된다. 오래전부터 책장에서 대기 중에 있기에, 흐름이 끊기기 전에 모두 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외면>으로 인해 또 다시 주춤하는 기분이 들기도 해서 나를 더 다독여야 할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외면>이라는 주제 아래 묶인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면서 이 소설들 자체를 외면했던 것은 바로 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미 외면된 삶의 주인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함께, 독특한 세계로 이끌어 준 저자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전작을 향해가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전작을 했다고 해서 저자와의 만남이 끝이 아니므로 그가 펼쳐놓은 세계에 온전히 빠져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