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타지에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꼭 2년을 일하고 결혼을 하고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지 간에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나를 품어주었다. 그럼에도 작은 소도시인 내 고향은 내가 없던 2년 전보다 생기를 잃은 기분이었다. 인구도 많지 않고 수도권과 거리가 있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변한 건 고향이 아니라 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내 고향도 전에는 정말 이랬는데, 모든 것이 풍요롭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오가고, 모두들 즐겁게 일했다. 그런데 고작 거미게가 있고 없고 차이로 완전히 쇠락하고 말았다. (21쪽)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아닌 조금 떨어진 도시가 나의 원래 고향이다. 그러다보니 그곳에서의 추억이 아직도 또렷한데, 특히나 하릴없이 친구들과 시내를 배회하고 걸어 다닌 기억이 최근 들어 많이 떠오른다. 당시에 시내였던 곳은 구시가지가 되어 완전히 활기를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곳을 꼭 한 번 걸어보고 싶다. 내가 간직한 추억들이 쇠락한 시내와 함께 실망하게 잊힐까봐 걱정이 돼서 아직도 그 길을 걷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주인공 마리는 대학 공부까지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쇠락해버린 고향을 보면서 실망도 하고 아쉬워도 하지만 자신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준 고향에서 작게나마 쇠락의 기운을 떨쳐버리려고 애쓴다. ‘아무튼 이곳에서 뭐가 되었든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고향을 좋아해야 한다’며 빙수가게를 연다. 질리지 않을 만큼 빙수를 먹을 수 있으니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단출한 메뉴지만 열심히 꾸려나간다.
불현듯 행복에 가슴이 메일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이 있을 장소를 갖고 있다는 행복이었다. 아, 그러네. 나는 정말 내 가게를 하고 있어…….(32쪽)
그런 행복감도 잠시, 마리에게 할머니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은 하지메라는 엄마 친구 딸과 여름을 같이 보내게 된다. 귀찮은 마음이 들었지만 엄마의 권유에 설득당해 하지메와 함께 보내게 되는데 어렸을 때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어 외모가 튀는데다가 할머니의 죽음에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 건강까지 잃은 사람과 함께 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마리의 선한 마음과 하지메의 섬세하지만 자기 색깔이 강한 내면이 만나 뜻밖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함께 빙수가게를 꾸려가면서 소박하지만 자신들의 존재 이유며, 여름 내내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는 즐거움, 그리고 함께 하면서 갖게 되는 소중함 등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지난할 것 같은 일상 속에서도 마리와 하지메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그런 시간 속에서 깨달아가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실들을 함께 나눈다. 친자매보다 더 깊은 유대감이 둘을 이어주었고 그런 와중에 하지메는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도 회복되어 가는 듯하다. 마리 또한 쇠락한 고향을 마주하며 느꼈을 아쉬움이 하지메로 인해, 빙수가게로 인해 삶의 방향까지 새롭게 정비되는 듯했다.
그러니 더욱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조그만 화단을 잘 가꾸어 꽃이 가득 피게 하는 정도다. 내 사상으로 세계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82쪽)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면서 현재 주어지는 시간이 무작정 이어질 거란 다짐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마리와 하지메는 하루살이와 비견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소소한 소망을 키워갔는데, 그래서인지 일상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하찮은 내 일상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모두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에 그만큼 너그러울 수 있다면, 이 세상은 틀림없이……. (151쪽)
하루 종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자극적인 뉴스만 골라보면서 삭막한 타인의 덧글을 자랑하듯 지인에게 전달하는 내 모습. 더 귀하고 소중한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함에도 시간 때우기처럼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이 반성이 많이 되었다. 정말 내 주변의 모든 것에 조금 더 너그러울 수 있다면. 세상이 변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당장 내 자신이 바뀔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잔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이 소설을 보는 내내 그런 용기가 샘솟았으니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 보고 싶어졌다. 일단 핸드폰을 좀 내려놓기. 그것만으로도 내가 보지 못한 일상의 다른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