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그리스 신혼여행기
1. 부부싸움
비상사태다. 아내가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다. 물론 누구나 신혼여행에서 싸우는 건 다반사다. 차라리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신혼여행에서 안 싸우는 게 오히려 드문 일인 것이다. 이제 막 결혼한 부부가 장기간 여행하는데 당연히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길 마련이니까.
문제는 신혼여행이 갖는 의미인 것 같다. 당연히 서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신혼여행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웃으며 넘어갔을 일조차 신혼여행에서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작은 틀어짐에도 침소봉대하게 된다. 게다가 신혼여행지가 외국이라면, 먼 타국에 말 통하는 사람이 상대방뿐이기에 모든 감정이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가 져주는 편이다. 정말이다. 어쩌면 내 생각뿐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착해서 넘어가는 일이 많다. 이 사실은 아내가 꼭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건 이번 메테오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호텔 방부터 그 바위산 절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메테오라란 말을 풀어쓰면 위를 뜻하는 ‘메타(μετά)’에 끌어올리다는 의미를 가진 ‘오로스(ἀειρΩ)’를 더한 것이다. 즉, 그렇기에 마치 하늘에 매달려있는 것 같은 바위산들의 모습을 지명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또 재밌는 사실은 하늘의 유성(流星)을 뜻하는 영어 단어 메테오(Meteor)도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단 것이다.
어원에도 담겨있는 하늘로 솟구치는 바위들을 보고, 천 년 전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땅의 고양(高揚)을 신에 대한 정신적 고상(高尙)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그러한 바위산 위에 수도원을 지었다. 처음에는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건물이 증축을 거듭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스무 채가 넘는 수도원들이 깎아지른 돌산 위로 위치했다.
수백 년 접근이 차단되어있던 이 지역은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이면서도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도르래를 통해서 산 위로 올라갔다면 지금은 계단만 열심히 걸을 자신이 있다면 오를 수가 있다.
물론 그렇게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메테오라는 종교시설이기도 하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사들이 아직 많은 수는 아니지만, 아직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 직접 방문해보니 열정적인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방문하기에 규칙이 있다. 너무 노출이 심한 복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민소매는 당연히 안 되고, 여성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어야만 한다. 그래서 전날 아내에게 미리 조심해야 하는 부분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아내는 신혼여행에 가져온 옷들을 집어넣고 바지를 입었다. 이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바지도 안된단다. 뭐 이야기할 건더기도 없고 짧은 영어로 "노- 노- "만 반복하고 있다. 이미 뒤에는 외국인들이 긴 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아름답다는 발람(Βαρλαάμ)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 복장 때문에 제지받았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손가락을 뻗어서 바닥에 쌓여있는 하늘하늘한 덮개 천을 가리킨다. 3.5유로란다.
어쩔 수 없다. 계산하고 수도원 안으로 들어왔다. 촌스러운 덮개 천으로 몸을 감싸게 된 아내는 화가 잔뜩 났다. 돌아다니는 내내 이건 성차별이고 상술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입은 이미 잔뜩 삐죽거렸다.
난 이미 돈까지 내고 들어온 김에 종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기분을 좀 풀어주기 위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유, 우리 투덜이 스머프”
이 말에 아내는 완벽하게 폭발해버렸다. 내가 자신을 지금 그냥 투덜거리는 걸로만 보고 자기랑 상관없는 일처럼 군다는 것이었다. 나도 억울한 마음만 들었다. 그렇게 메테오라로 신혼여행을 가서 부부싸움을 하느라 구경도 뒷전이 되었다.
지금 난 글을 대단히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기사(記事)란 사실을 알리는 글이라고 한다. 작가의 감정이나 생각에 상관없이.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은 매우 좋은 기사다. 매우 냉철하게 당시 상황만을 전달하고 있다.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어쩌면 정말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 공감 능력이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당장 외국에서 다른 이의 종교적 율법에 맞추느라 옷차림을 구속당하면 기분이 나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걸 이해 못 해주는 건 남편으로서 내 부족함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나는 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도 내 잘못이 아닌걸?
2. 그리스인들의 신앙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성당은 수도 아테네가 아니라 파트라스에 있다. 성 안드레아 대성당. 메테오라에 오기 직전, 시간을 내 들릴 수가 있었다. 이 성당은 기독교 세계에서 워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꼭 방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안드레아가 순교한 곳에 세워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성 안드레아의 머리뼈와 그가 처형당한 X자형 십자가 조각을 전시하고 있었다. 은과 보석으로 장식한 성 유골함이 인상적이었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성당에 계신 현지인 할머니 한 분이 내 손을 끌어 직접 머리뼈를 보는 위치에 서게 안내해주셨다. 나름 그분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성 안드레아는 성경에는 기록된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이후 로마 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부터 이 지역 최초의 주교로서 공경받았다. 가톨릭의 바티칸은 자신들의 뿌리를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로 삼고 있는데, 그렇기에 정교회에서는 반대로 안드레아가 중요시되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정교회 국가인 그리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다. 동유럽 문명의 성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십자군 당시 성 안드레아의 유해는 이탈리아로 옮겨져 아말피를 거쳐 바티칸에서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1964년 현대에 들어와 동서교회가 화해하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 선물로 유해가 다시 돌려보내졌는데, 당시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온 그리스인들이 거리로 나와 환영했다고 한다.
신혼여행 동안 그리스 전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이들에게 ‘그리스인다움’과 이들의 종교는 서로 사실상 동일시된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레 어느 시골 섬마을에서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파란색과 하얀색 국기가 휘날리는 성당이었다.
지금에 와서 메테오라를 추억하면 떠오르는 건 물론 그 수도원들의 위용보다도 그 안의 프레스코화였다. 중세의 끝 무렵 이들은 신앙을 회반죽 벽에 그렸다. 기도실이나 회당에 들어가서 천장까지 덮고 있는 프레스코화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수도자는 평생 이 그림을 보며 기도하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본다.
수도원 구석에 가보니 최근에 그린 프레스코화 형식의 그림도 있었다. 천지창조부터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메테오라의 건설, 그리스 독립전쟁과 아테네 올림픽까지 한 장에 담겨있었다. 그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배치하여 민족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수블라키를 파는 어느 그리스 식당에서 한쪽에 작게 놓여있는 성화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터에 눈높이를 맞춰 성화를 놓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의미가 궁금했다. 숯불 앞에서 종일을 보내는 노동이 신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신앙을 드러내는 일은 왠지 꺼려지는 일이다. 자신의 특수성, 혹은 심지어는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학 교수님에게 한국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건 어느 집단에 속하고, 그 규율에 따른다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게 당연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다른 문화권에서 꼭 그런 건 아닐 수 있다는 말도 덧붙었다.
그리스인에게 그렇다면 신앙은 무슨 의미일까? 자기 민족의 역사와 자신의 신앙이 일치하는 나라에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해외여행을 가면 다른 종교에 관심 두는 편이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그들만의 관점이 탐난다.
3. 신앙의 미래
요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탈종교화’이다. 종교 인구가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탈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스레 종교의 고령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라기보다는 관심 자체가 없어지는 현상이 원인이라고 한다.
흔히 선진국이 일반적으로 겪는 현상으로 해석한다. 이미 구미권에서 주요 종교는 이민자들의 종교로 대체 되었고, 기존 종교는 젊은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관습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이제 한국도 자연스레 그 궤적을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생각은 필요성이다. 우리에게 신앙이 아직 필요할까?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 내 삶의 일부를 떼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 굉장한 에너지를 쏟는 일이다. 게다가 정작 그 신앙생활이 시민으로서 해가 된다면 더 그러하다. 어느 책에는 종교가 세상을 설명하는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생활양식의 일부로 축소되던가, 반동(反動)이 될 뿐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공룡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성경에는 공룡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과 내가 무슨 기반을 토대로 삼아 대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난 오히려 공룡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내의 옷차림 사건처럼 많은 신앙은 성차별적이고 너무나 보수적이다. 만약 사회의 다른 부분이었다면 지탄받을 말이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받고 보호되기도 한다. 남성인 나는 사실 오히려 무감각할 때도 많을 것이다.
메테오라 작은 수녀원에는 어여쁜 꽃 화분이 놓여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수녀님이 아마 매일 물을 줄 터였다. 그리고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절벽인 건물 부엌에서 요리할 것이다. 또 수백 년 된 프레스코 벽화 아래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반복된 삶을 살 것이다.
사실 한 번쯤 수도자의 삶을 꿈 꿀 때가 많았다. 선택과 집중. 절벽 위 수도원을 내 우주로 삼아 반복적인 일상에서 무언가에 몰입하는 삶. 특정 종교가 아니더라도 속세를 벗어나는 건 늘 매력적이었다. 나에게만 인생은 너무 쉽게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도 고민이 끊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신앙의 힘으로 많은 것이 이미 결정된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신앙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탈종교화’가 결코 보편적인 현상이거나 결국 정해진 목적지가 아닐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는 종교 인구는 오히려 늘고 있다. 물론 특정 지역의 출산율에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도시화와 산업화가 오히려 보편종교의 확산을 증대시킨다는 연구도 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개발도상국 노동자에게 신앙은 삶에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암흑기라고 쉬이 생각하는 유럽 중세에도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인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대부분 사람은 일상생활에서는 마을 내 민속 의례를 따랐다. 그만큼 그들에게 신앙생활은 다층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이 보편종교가 대세가 된 지금의 모습이 사실은 보통이 아닌 예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나는 인류가 더욱 종교적인 미래를 예측한다.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하는 더 규율적이고 전통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메테오라의 옷차림 규칙이 얼마나 더 오래 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메테오라의 바람 수도원을 나오는 길, 고양이들이 잔뜩 있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져 아내와 화해했다. 그리고 자동차로 크게 바위산을 둘러 나왔다. 모든 수도원을 다 방문할 수는 없었기에 눈으로 담았다. 그리고 괜스레 성심이 들어 렌터카에서 CCM을 틀고 아내와 노래를 부르며 운전했다.
사하촌(寺下村) 칼람바카(Καλαμπάκα)로 내려와 중부 그리스를 관통하며 남쪽으로 끊임없이 내려갔다. 높았던 산들이 다시 점차 평탄해졌고 바다가 가까워졌다. 중간에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이었던 테르모필레(Θερμοπύλες)를 구경하기 위해 잠시 고속도로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테르모필레 전투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영화 <300>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해안선이 후퇴하고 있어 옛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아직도 이타카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만큼 요충지이긴 했다.
고속도로에는 점차 차가 많아졌다. 덕분에 그전까지 속도를 내며 신나게 달렸지만,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본토 자동차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의 신혼여행도 끝나갔다. 마지막 목적지는 처음 여행을 시작했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