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일본 여행에서 온천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탄 기차는 유다온천 역에서 멈췄다. 어디서나 볼 법한 동네 작은 역사. 기관사가 직접 승객들이 모두 잘 내리고 또 탑승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숙소를 굳이 이곳에 잡은 이유는 당연히 온천 때문이다. 물론 널리 이름이 알려진 곳은 아니다. 하코네나 유휴인과 같은 유명 온천 관광지들은 이제 길거리에서 한국어를 더 많이 들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유다 온천은 아직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아 그 나름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와본 사람들의 후기에 따르면 “숨겨진 보석 같은 마을”이라 하니 기대 만발이었다. 비록 예상대로 교통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었다.
흰색 여우 캐릭터를 동네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옛날에 여우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연못에 발을 담그는 것을 어느 스님이 우연히 보았다. 그곳을 파보니 온천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렇게 유다온천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택시를 타기에는 아까워 걸어가기로 용기를 내었다. 여름을 얕보았는지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걷고 있으니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끌고 온 캐리어 바퀴가 울퉁불퉁한 동네 길가에서는 덜컹거리기 일쑤다. 다행히 이곳은 일본 소도시만이 갖는 나름의 운치가 있어 구경하는 맛이 났다. 이곳 유다온천이 있는 야마구치 시(市)는 현 청사 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20만이 채 되지 않았다.
동네 구경은 해가 지고 선선해지자 다시 할 수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어기적어기적 산책하고 있으니 제법 휴양지 느낌이 났다.
시가지 가운데 ‘키츠네노아시아토(狐の足あと)’라는 족욕 카페를 찾았다. 그 이름은 여우의 발자국이라는 뜻이다. 온천수에 발을 담그며 커피 한잔을 음미할 수 있어 인기 있다. 일본의 커피는 우리와 취향이 다른지 한국 아메리카노를 생각하고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실망하기 일쑤다. 그래도 다행히 이 카페는 원두 향이 나쁘지 않았다. 족욕을 위해 신발을 게다로 갈아신었다.
가게 족욕탕은 실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밤공기를 맡으며 따뜻한 물로 족욕을 하니 노곤함이 몰려왔다. 반대편에 발을 첨벙거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어린 커플을 보며 주책 맞게도 너무 예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키츠네노아시아토는 관광객을 위한 종합 정보 안내 센터이기도 하다. 시청에서 마을 만들기의 일환으로서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가게 한쪽에는 특산물들과 각종 팸플릿이 같이 놓여있었다. 관광 안내서를 꺼내 들어 찬찬히 읽어보니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한때 이곳 야마구치 시는 ‘서쪽의 교토(西の京)’라 불리며 융성했다는 이야기였다.
이 도시는 일본 전국 시대를 견디는 방주와도 같았다. 죽고 죽이는 난세를 피해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조선과 명나라와 교역했고 문화가 융성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렇듯 이 도시를 설명하기 위해 오우치(大内氏) 가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놀랍게도 자신들을 백제의 핏줄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가문이었다. 정확히는 백제 성왕의 삼남 임성태자의 후손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여러모로 다른 가문들과는 차별화되었다.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했다. 게다가 바다를 넘어 교역에도 적극적이었던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오우치 가문은 대내전(大內殿)이라는 이름으로 248번이나 등장한다고 한다. 이들은 동남아에서 수입한 코끼리를 조선에 선물로 보내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팔만대장경을 보내주면 왜구를 대신 소탕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고, 자신들의 족보를 확인할 수 있다면 백제 땅인 전라도의 영주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현청 건물 뒤편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루리코지(瑠璃光寺)라는 절이 있다. 오우치 가문이 조성한 곳이다. 야마구치 여행의 필수 코스다. 이곳에 일본에서 꽤 유명한 오층탑이 있다. 자그마치 일본의 3대 탑 중 하나로 국보 취급이란다. 3대 탑 중 다른 두 개는 각각 교토와 나라에 있다니, 이 때문에 ‘서쪽의 교토’라는 별명을 얻었나 싶다. 밤이 되면 촛불을 켜놓는데 호수에 비친 탑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세상에! 가는 날이 장날이다. 잔뜩 기대하고 갔더니 태풍 때문에 수리 중이라고 한다. 문화재 가림막만 허망하게 쳐다보다 왔다. 언제 다시 와볼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어 속이 쓰렸다.
그래도 오우치 시대를 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시 현청 앞에서 언덕을 하나 넘어와야 한다. 바로 하비에르 야마구치 성당이 보인다. 일본 가톨릭의 성지로 장엄하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회 창립 인원 중 하나다. 선교를 위해 그는 인도와 마카오를 거쳐 당시 서양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나름 번영하였던 야마구치로 와 아무것도 없는 우물가에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한 성당이다.
이러한 하비에르를 후원했던 것도 오우치 가문이다. 확실히 문화적 개방성과 자신감이 남달랐던 것 같다. 그 결과 이 지역 인구의 10% 정도가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란 추산도 있다.
들어가 보니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성당 안은 조용하다. 본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다. 지하로 내려가니 하비에르의 삶과 일본 잠복 기독교인을 주제로 한 박물관이 있다. 일본 기독교의 역사를 보며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떠올렸다.
잠시 이곳에서 신앙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땅에 선교를 위해 입국했던 하비에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통일되고 쇄국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된다. 물론 수백 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 현대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에 불과하다. 관광 안내서에 이 하비에르 성당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를 지낸 곳”.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서 멈출 뿐인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개방적이었던 오우치 가문은 한때 교토에 입성해 일본 최고 지도자 쇼군을 대신하는 칸레이(管領)에 오른다. 즉, 시대의 패자에 오른 적 있는 가문이다.
일본 전국 시대를 다룬 작품들이 머릿속에 지나간다.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감명 깊게 읽었다. 과거 해적판이었던 ‘대망’의 일부분으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만약 피를 피로 씻었던 시대를 산다면, 우리는 평화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일본인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 전국 시대와 뒤를 잇는 에도시대라고 한다. 혹시나 오우치 가문이 일본 통일을 이루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게 융성했던 오우치 가문을 나약하다고 여겼던 부하 무사들의 배신으로 몰락한다.
이번 여행의 대부분은 기차와 버스를 이용했다. 그래서 미리 한국에서 JR 야마구치-히로시마 패스를 구매했다. 민영화된 국철인 JR 그룹에서 발급하는 이 패스는 오직 외국인만 구매할 수 있다. 후쿠오카의 하카타부터 시작해서 야마구치현 전체와 히로시마 주변까지 이 패스를 통해 열차와 고속버스를 탈 수 있다.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기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게다가 이 패스의 좋은 점은 히로시마 주변의 미야지마섬으로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미야지마섬은 안개에 뒤덮여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다. 일본 민속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라고 한다. 흔히 바다 위의 붉은 도리이로 대표되는 정경으로 대표된다. 이 섬의 신사와 도리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면서 일본의 3대 경치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섬에서 기존 세력이었던 오우치 가문과 신흥 세력인 모리 가문(毛利氏)이 격돌했었다. 미야지마섬의 다른 이름을 따 이츠쿠시마 전투라고 한다. 당시 모리 가문은 세토내해 섬들 사이에서 난동을 부리던 해적들의 도움을 받아 오우치 가문의 배를 불살랐다. 결국 이 작전은 대성공이었고, 그렇게 모리 가문은 새롭게 서일본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일본의 3대 기습 전투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고 보니 왜 이렇게 일본인들은 3대 무엇 무엇을 이리 좋아하는지 의문이 든다. 벌써 여행에서 일본 3대 탑, 일본 3대 경치, 일본 3대 기습 전투가 나온다.
물론 유명한 몇 가지를 꼽으며 목록을 만들어 홍보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비슷할 것이다. 심지어 움베르트 에코는 목록 만들기를 문명의 시작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굳이 숫자 3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지긴 한다. ‘아Q정전’을 쓴 루쉰은 비슷한 맥락으로 이야기했던 적도 있다. 그는 중국인이 뭐만 하면 10대 무엇을 꼽는 것을 보며 광(狂)적이라고 비판했다. 숫자가 안 맞으면 억지로라도 끼워 넣어 10개를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3대를 꼽는 것을 좋아하고, 중국인은 10대를 꼽는 것을 즐기듯이, 내가 느끼기에는 한국인은 8대를 꼽는 것을 좋아한다. 그 증거로 요즘 동네마다 8경이 없는 곳이 없다. 정말 그러고 보면 이런 류 목록 만들기는 동아시아 지역의 공통일지도 모르겠다.
그 미야지마 신사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한 도리이 사진을 찍었다. 만조에만 보이는 광경인 데다 평소 관광객들로 가득 차 사진 찍으려면 하루 종일 걸린다고 하니 나는 운이 좋았다. 확실히 히로시마에 가까워질수록 어느새 외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야마구치현을 여행할 때는 다른 관광객은커녕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긴 했다. 영어도 안 통해서 손짓과 발짓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야마구치현 호후(防府) 시에 승리자 모리 가문의 정원이 있다.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대문에 직선 아래 별 세 개가 그려져 있는 모리 가문의 문양이 반겨줬다. 정원은 아름다웠다. 인공미가 강한 다른 일본 정원들과 다르게 자연과 얽혀있어 천천히 구경하기 좋았다.
모리 가문은 야마구치현을 수백 년 동안 지배했던 가문이기에, 이 외에도 모리란 이름이 붙은 장소를 꽤 볼 수가 있다. 이 정원은 옛 부하들이 메이지 유신을 끝내고 과거 주군을 위해 지어준 곳이다.
사실 모리 가문은 이전의 오우치 가문과 달리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가문이다. 당장 임진왜란 당시 군사 3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던 역사가 있다.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가기도 했다. 게다가 메이지 유신의 근거였던 조슈번의 영주였고 이후 조슈번 출신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강제 합병했다. 그래서인지 대한제국을 다뤘던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에서는 이 모리 가문 출신이 일본군 악역으로 등장한다.
이런 모리 가문을 일으킨 것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라는 인물이다. 꾀가 많아 일본 전국 시대 마니아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다.
이 모리 모토나리는 ‘3가지 화살’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줄거리는 익숙하다. 어느 날 모토나리가 자신의 세 아들에게 화살 한 대씩을 부러뜨리게 하자 모두가 쉽게 부러뜨렸다. 하지만 세 대를 한 번에 부러뜨리게 하자 아무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듯 형제가 우애 있게 합심하면 아무도 무너트릴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 이솝우화에도 나오는 오래된 플롯이다.
그런데 이 3가지 화살 이야기가 일본인들에게 모토나리의 이야기로 전해지는데 이유가 있다. 장남을 제외하고 두 아들을 다른 가문의 양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가서도 본래 가문의 우애와 의리를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세 아들을 그렇게 흩어져서도 본래 가문에 충성했다고 한다. 형제란 건 어렸을 때는 친해도 각자 가정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멀어지기 마련이란 말이 있는데, 예외적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그 배신과 이합집산이 난무했던 일본 전국 시대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이 가문은 서일본의 중심이자 통일 정권의 주요 직책을 계속해서 맡는다.
하지만 형제의 우애가 다음 세대까지 넘어가기는 쉽지 않은 것만 같다. 일본 전국 시대의 마침표를 찍은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결정적인 배신이 일어나게 된다.
다시 장소를 이와쿠니(岩国)로 옮겨야겠다. 여기까지는 야마구치현이지만 바로 옆에 대도시인 히로시마가 있어 사실상 히로시마 위성 도시 느낌이 든다. 여행을 계획할 때도 보통은 히로시마 근교로 같이 묶인다. 하지만 나는 여행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하고 있기에 야마구치현을 다 둘러보고야 나중에 도착하게 되었다. 세토내해를 바라보는 작은 도시다. 이번에는 고속철도 신칸센을 타고 도착했다. 역시 히로시마-야마구치 패스는 다시 한번 유용했다.
기차에서 내릴 때 주일미군 병사가 같이 내렸다. 이곳 이와쿠니에는 미군의 비행장이 위치하는데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지금도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일본의 3대 사랑이 시작이다. 이와쿠니 시내로 들어가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눈에 띈다. 일본의 3대 다리 중 하나라는 긴타이교(錦帯橋)다. 참 이번 여행을 통해서 3대 탑, 3대 경치, 3대 기습 전투지, 3대 다리를 모두 보게 되었다. 마치 반복되는 무지개처럼 아치형 다리가 계속되어 강 건너까지 닿아있었다. 역사가 300년이 훌쩍 넘은 목조다리다. 건너는데도 요금이 적지 않게 든다.
이 다리를 지은 것은 깃카와(吉川氏) 가문이다. 모리 모토나리가 둘째 아들을 입양 보낸 가문이기도 하다. 깃카와 가문으로 입양되었지만 본래 가문에 충성을 다했던 아버지와 다르게 손자 대의 깃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왜란을 실패로 돌아갔다. 한반도로 파견되었던 무사들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무리였던 전쟁의 후처리를 둘러싸고 정권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다. 이렇듯 일본 전국 시대의 마지막은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맞서기 위해 모인 군대를 서군이라 하는데 이때 모리 가문의 수장은 총대장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모리 가문의 소속이었던 깃카와 히로이에 역시 전쟁에 나서게 되었는데, 천하의 향배가 결정났다고 생각했던 그는 적과 몰래 내통한다. 그리고 전투가 일어나도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군대를 움직여야 한다고 재촉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그는 홀로 “도시락을 마저 다 먹어야 한다”라며 빈 찬합에 젓가락질만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결국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나서도 역사 속에서 깃카와 히로이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문을 배신한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승자의 편에 선 대가로 이곳 이와쿠니를 영지로 받았다. 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을 지었는데 이곳으로 가는 길이 긴타이쿄이다.
하지만 깃카와 히로이에를 단순히 배신자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모리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기는 했지만, 히로이에의 구명 덕분에 멸문지화를 피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이 지나서야 모리 가문의 영지였던 야마구치현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결국 에도 막부를 타도하는데 성공했다..
야마구치현을 여행하면 오우치와 모리, 두 가문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역사야 나 같은 호사가에게만 재미있는 일이 아닌지 가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공부는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를 높이는 작업 같은 것이라서, 만약 몰랐다면 지나쳤을 예쁜 다리와 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게 해준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더라도.
사실 우리의 눈에 비추어 보면 일본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인명이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정서가 다르다. 외침에 시달려 왔던 우리 역사에 비하면 길고 긴 내전이 지속된 일본사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모모키 시로란 역사가는 이에 일본사는 ‘동북아’라기 보다는 ‘동남아’에 가까웠다는 주장을 말하기도 했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와 과거제를 중심으로 했던 중국이나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와 일본은 궤를 달리했다는 것이다. 가족부터 권력 구조에 이르기까지 뻗어있는 개인적 주종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였다. 그렇기에 차라리 태국 역사와 일치하는 점이 많다. 반면 오히려 중국을 통해 문명을 수입했던 베트남이 동북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리가 아닌 문명에 초점을 둔 접근이다.
역사 이야기는 그만해야겠다. 이번에도 음식으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만 같다. 역시 여행기에서 식도락을 빼먹을 수 없다.
다리를 구경하고 내려와서 시내로 들어가니 향토 식당들이 줄 서 있다. 히로시마에 더 가까워서 그런지 다른 야마구치 지역과는 약간은 음식의 결이 다르다고 느꼈다. 야마구치 음식은 재료가 단순하고 투박하리만치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데 여기 이와쿠니에서는 재료가 다양하고 화려했다. 일본에서도 그래서인지 이와쿠니는 토속 음식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어디 식당을 들어갈지 고민이 들었다. 시간이 애매한 시간에 도착했다. 일본 작은 도시에서는 쉬는 시간을 오래 가져가는 식당들이 많다.
괜히 지도 앱을 켜 평을 비교해 가면서 맛집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기분 따라 어느 할머니가 홀로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 탁자는 하나 뿐에 알아들을 수 없는 라디오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분위기 있는 것은 곳이었다. 밖에서 식당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와쿠니 초밥’이라고 쓰여있는 홀로 흔들리는 깃발뿐이었다. 메뉴판을 보고도 뜻을 알 수 없어 손짓으로 음식을 그려가며 주문했다.
어떻게 알아들으셨는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음식이 나왔다. 마치 시루떡처럼 틀에 찍어 여러 겹으로 쌓은 이와쿠니 초밥. 그리고 막 튀긴 연근 고로케였다. 그리고 따뜻한 차 한잔. 허겁지겁 먹기에는 아쉬워 찬찬히 젓가락으로 쪼개어 맛을 보았다. 맛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누군가 히로시마 여행을 한다고 하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와쿠니를 추천하곤 한다. 사실 인터넷에는 웬 나무다리 밖에 볼 것이 없는 여행지란 악평이 많다. 하긴 일본 소도시 여행이 요즘에야 젊은 세대에서 유행이라지만, 그 한적함밖에 없는 여행지에 대해 불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올 만한 여행지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여행은 다시 추억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긴다. 그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해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 긴타이교를 보면서 밥을 먹었다. 지금도 야마구치 여행을 기억하면 그날 따뜻했던 고로케 맛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