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한균 Aug 31. 2024

4. 동해 이야기 (하기)


일본에서 바라본 동해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시가지를 벗어나 해변으로 들어서자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특유의 바다 비린내도 거의 나지 않았다. 물색이 너무 예뻐 갑자기 발이라도 담그고 싶어졌다. 계획한 바는 아니지만 양말까지 벗고 첨벙첨벙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소나무 해안림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옛 성터가 마치 방파제처럼 둘러싸고 있어 파도도 잔잔하다.

키쿠가하마 해변에서 본 동해 @촬영

그리고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저 바다 건너에 우리나라가 있겠거니 생각이 미쳤다. 지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질 때 느끼는 기묘한 감각이 있다. 동해가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이번 여행은 이곳 하기(萩)를 중심으로 계획했던 여행이었다. 꼭 한번은 직접 오고 싶은 도시였다. 여행기도 하기 편을 위해서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문장을 쓰는데 적잖이 부담이 느낀다. 결국 내가 여행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옮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 밑천이 글 때문에 모두 드러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숙소가 있던 유다 온천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꼬박 달렸다. 산길은 구불구불 계속 이어졌다. 도착해 보니 정류장부터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잔뜩 줄을 서 있었다. 하기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수학여행 장소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주나 익산 같은 느낌에 가깝다.   


하기시는 인구가 채 5만이 되지 않는 소도시다. 동해에 맞닿아 있고 나머지 삼면이 산이다. 방파제가 보이는 어촌 풍경은 어느 그리 특출난 게 없다. 그럼에도 이곳을 사람들이 찾는 그 역사성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일본의 유네스코 등재 목록인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중 5개가 이곳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은 아닌 것 같다. 하루 종일 있으면서 영어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시골은 시골이다.


일본에서 영주가 사는 성 바로 아래 형성된 마을을 조카마치(城下町)라고 한다. 하기도 그런 곳이 있다.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몇몇이 눈에 띈다. 100년 전 지도를 가지고 지금도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된 곳이라고 한다. 

하기 조카마치. 수학 여행중인 중학생들이 보인다. @촬영

전국시대 서군의 총대장이었던 모리 가문은 패배하고 대부분의 영지는 몰수당한다. 에도 막부는 모리 가문에게 대신 산맥 건너 좁은 땅 하기에 새로운 성을 짓도록 허가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실상의 유배지다. 조카마치가 이곳에 형성된 이유다. 지금은 성은 흔적도 없다. 근대화 이후 먼저 사무라이들이 솔선수범해서 없애버렸다고 한다.   


조카마치를 돌아다니니 오래된 집마다 설명문이 눈에 띈다. 집들이 다 유명 인물의 생가다. 일본어로만 설명이 쓰여 있어 다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 일본사를 바꾸어 놓았던 인물들이었던 건 분명하다. 역사를 살펴보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특정 세대 혹은 특정 지역에서 위인들이 유독 대거 튀어나온다. 하기도 그런 곳이었다. 한때 같은 골목을 공유하던 시골 청년들이었지만, 결국 체제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는 이런 쏠림 현상은 현대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IT 기업의 창립자들은 비슷한 학번의 특정 대학 출신인 경우가 많다. 기업이 아니더라도 당장 비틀스의 맴버들이 동네 친구라는 것은 우리 세계의 놀라운 사실 중 하나다. 책에 따르면 사회가 변화할 때 그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먼저 움직이는 젊은 집단에서 사회를 주도해 나가며 격차를 만든다.   


그런데 내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그곳이 왜 하필 이곳 하기였을까? 일본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 이 변방 시골 마을이라는 건 그럼에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야마구치는 일본 보수의 성지(聖地)라고까지 불리는 지역이다. 내가 가본 박물관에는 이 야마구치 지역에서 배출한 8명의 총리 등신대까지 있었다. 그만큼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리를 배출한 지역이라는 자부심이 높았다. 그 총리 명단은 자그마치 처음이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토 히로부미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총리가 아베 신조다. 한국인으로서 솔직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동해 바로 건너 이 마을이 어째서 그런 강성(强性)을 띄는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여행을 시작하게 했다.   


다행히 하기 시청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마을버스를 운영한다. 실제로 타보니 동네 사람들도 애용하는 교통수단이다. 버스 기사와 할머니가 낯이 익은 듯 대화한다. 이 버스를 타고 쇼카손주쿠(松下村塾)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이제 쇼카손주쿠는 성역화가 이루어진 공간이다. 옛 건물은 별것 없다. 한자 그대로 소나무 아래 작은 서당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변을 박물관과 신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쇼카손주쿠 본 건물. 이 건물을 신사와 박물관이 둘러싸고 있다. @촬영

이 서당의 젊은 훈장이었던 인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일본 보수들은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모신다. 마을에서 보았던 일본 근대화를 이끌었던 이들 중 많은 수가 이곳에서 수학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로 새워진 신사에서 요시다 쇼인은 신(神)으로까지 모셔진다. 지금도 일본 정치인들이 때때로 찾는다고 한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로부터 일본 근대화가 시작되어 주변을 둘러싸며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다는 세계관이다.    


박물관에는 그의 일생을 정리해 놓았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한 인물이기에 남긴 것은 많지 않다. 흑선내항(黒船来航) 당시 미국 배에 도항하여 세계를 둘러보고 싶어 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후 일본을 주유하며 사상적 배경을 쌓았다.   


역시 그의 일생을 완성한 것은 죽음이다. 고향에 돌아와 요시다 쇼인은 집 앞에 쇼카존주쿠를 만들고 제자들을 길렀다. 이때 하기의 젊은 사무라이 그룹이 그에게 열광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념이 극단화되는 그룹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에도 정부에서는 이러한 조류에 전국적인 공안정국과 대규모 숙청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쇼인는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그는 그렇게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제자들을 남았다. 이들은 차후 지역 정치를 장악했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 아래 궐기해서 승리했다. 역사의 승리자가 된 그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모두 스승에게 돌렸다.   


요시다 쇼인에 관해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한론(征韓論)’이다. 한국에서 그에 대해 검색하며 관련된 검색어로 같이 나온다. 그는 끊임없이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선제적인 울릉도 개척 등 행동을 정부에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에도 정한론은 일본 젊은 사무라이 계급에서 널리 퍼졌다. 결국 일본 신정부의 정책에도 영향을 주게 이른다.   


나는 궁금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본래 한반도 문제와 얽혀있는 것일까? 애초부터 일본 보수주의는 침략을 배태한 사상에서 출발했을까?   


당시 젊은 사무라이들은 세계 정세를 인식하며 자신들의 역사에 미루어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당시 세계는 또 다른 전국시대였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당연히 난세의 규칙을 따르기로 했다. 최후에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주변 약소국을 병합하여 강병을 이루는 것이다.   

“에조치(훗카이도)를 개간하고 캄차카(현재 러시아 캄차카 반도), 오호츠크를 탈취하고 류큐(오키나와)도 점령해 그 영주들을 에도로 불러들여야 한다. 또 옛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일본에 공납을 바치도록 하고, 북쪽으로는 만주 땅을 얻고, 남쪽으로는 타이완, 필리핀(루손)을 손에 넣어 일본의 진취적인 기상을 보여줘야 한다.”
요시다 쇼인의 유수록 재인용,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김세진   

놀라울 정도로 이후 일본 제국주의 흐름을 마치 예언한 듯한 말이다. 그들의 약육강식의 세계관은 그렇게나 강렬했다. 결국 사람의 관점은 경험과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것 같다. 일본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변경에 살던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요시다 쇼인이 이곳 하기에서 탄생한 것은 필연처럼 느껴진다.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하던 일은 이 지역의 해안 포대 정비였다. 일종의 징후다.   


“헤이룽, 홋카이도는 우리 번에서 멀고, 그것보다는 다케시마, 조선, 베이징의 건이 우리 번에게는 시급하다고 여겨진다.”
- 요시다 쇼인 재인용,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하는가, 하종문   

하기 이 땅이 한반도에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가 태동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가 바로 지천이기에 그런 세계관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아까 내가 발을 담그며 아름답다고 감탄했던 동해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바다가 요시다 쇼인에게는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백년 전 그는 바다를 건너에 있을 가상의 적들을 상상했다. 섬나라의 숙명이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다른 바다를 볼 기회가 많았다. 여행지인 야마구치는 세토내해와 관몬 해협을 역시 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렀던 주요한 관광지들도 바다와 연관되어 있는 곳도 많았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이름 높다는 절경도 끼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기에서 바라본 동해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여기에 버금갈 곳도 많지 않았다고까지 치켜세우고 싶다. 편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동해는 동해이기 때문에 남의 바다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살 이번 세기에는 동해가 평화의 바다이기를 바란다.

골목에서 만난 귤나무 과수원 @촬영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하기를 걷다 보면 골목 사이사이로 귤나무가 참 많다는걸 알 수 있다. 지역 특산품이라 한다. 그래서 동네 마스코트까지도 노란 귤 하나를 들고 있다. 나의 외가가 제주도에 있어 그런지 귤 과수원 주변을 지나니 친근한 마음도 들었다.    


일본의 여름 날씨는 무더웠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동네 마트에서 사서 입에 물었다. 앉아서 역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반사로와 조선소 터로 갈 버스를 기다렸다. 어느 유모차를 몰고 있는 젊은 부부가 쇼카손주쿠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도 적지 않은 인원이 찾는 모양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와 비교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박규수의 사랑방’일 것이다. 박규수는 역관 오경석과 함께 청나라를 드나들며 당시 조선에서 세계 정세를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할아버지가 북학파의 대가 그 박지원이었으니 집안 내력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던 젊은이들이 우리가 교과서에서 개화파라고 부르는 인물들로 성장했다.   


괜한 치켜세움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 쪽이 더 가능성 있었다고 평할 부분도 많다. 요시다 쇼인은 그래봤자 결과적으로 젊어서 사형당한 시골 훈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제자들의 출신도 대부분 지방 하급 사무라이 계급이다. 하지만 박규수는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아래 배웠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김홍집, 유길준,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등 당시 조선의 최고 수준 엘리트들이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달랐다. 쇼카손주쿠는 지금 이렇듯 성지화되었지만, 지금 박규수의 자택은 지금 헌법재판소 자리에 비석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 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어쩌면 그 차이가 바로 위치 때문이 아닐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기는 변방이고 외진 곳이기다. 그래서 쇼카손주쿠에서 배운 사무라이들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켜 지방 정권을 먼저 장악할 수 있었다. 반대로 박규수의 저택은 사대문 안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기에 자신들의 뜻을 먼저 실현해 볼 공간이 없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지방으로부터의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럽 국가들과도 다른 궤적이다. 당시 일본에서 각각의 지방들은 독립적이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혹은 중앙과 경쟁과 협력을 반복했다. 그렇기에 만약 성공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면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지방 영주들이었다. 

세계문화유산 반사로 @촬영

반사로는 철제 대포 생산을 위한 금속 용해로였다. 이곳을 지배하는 가문에서 안보상의 이유로 시험 삼아 만들었다 지금은 유물로만 남았다. 일본은 이러한 시행착오가 쌓여 결국 분출될 수 있었다. 반사로를 보면 약간은 착잡해졌다.   


조선의 중앙집권은 과대평가 되어있다. 개별 고을들까지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는 사대부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누구나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흔히 상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교 이상에 걸맞은 통치는 조선 후기에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경향분기(京鄕分岐)라는 현상 때문이다. 한양과 그 외 지방은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구분되어 있었다.   


한양에 살고 있는 양반들은 지방의 양반들과 자신들을 구분했다. 과거시험도 비정기로 이루어져 사실상 한양에 있어야만 참여할 수 있었다. 관직들도 몇몇 세가들이 독점했으며, 결혼 역시 왕가를 포함하여 그들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당장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의 고향을 보면 지방 출신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영호남학파니 하며 지역색에 기반한 학문 당파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넘어와, 흔히 실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출신은 대부분 한양과 그 근교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정약용 대에 이르러서는 그가 자식들에게 “절대 서울을 벗어나지 말라”고 글을 남기게 된 것이다. 오직 한양만이 조선이었다.   


그렇기에 일본과 달리 중앙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지방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학문이라고 하여 한양 부유한 상류층의 ‘서브컬처’로만 남았다.   


계속 궁지에 몰려있던 일본의 근대화 세력들이 전세를 역전시킨 사건은 조슈 전쟁이다. 전쟁사에는 가끔 예외가 있다. 특히 소수가 다수를 제압할 때가 그렇다. 에도 중앙정부는 계속되는 급진 행동의 책임을 물어 조슈, 지금의 야마구치로 출병한다. 이에 지방 영주는 항복을 결정하지만,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시모노세키에서 거병한다. 최초에는 수십 명 정도의 사병으로 시작하여 300명으로 수가 불어난다. 이를 통해 먼저 지역 정권을 장악하고 15만 명의 중앙 원정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소설 ‘데미안’에서 말하듯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화는 보통 구체제를 무너트리는 과정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것만 같다. 여기까지 조선이 가지 않은 길을 안타까워했다.   


하기시 여행은 메이린칸(明倫館)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명륜관’이다. 수백 년이 된 옛 학교건물이다. 일본 3대 학교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성취가 높았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로 사용하지 않고 관광 안내소이다. 모든 시외버스와 마을버스가 이곳을 중심으로 운행한다. 그래서 무조건 여기부터 구경하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명륜이란 이름에서 유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하기에서는 이전부터 무속과 불교를 꺼리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지역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유교식으로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는 중국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지나 일본으로 유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곧 근대화로 보기도 한다.

메이린칸(明倫館) @촬영

이번 여행을 통해 일본사 책을 잔뜩 읽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재밌는 부분이 있다. 바로 변화의 시점에서 초기에 일찍이 죽은 이들의 평가는 높은 데 반해, 더 오래 살아남아 결국 성공한 이들의 평가는 도리어 낮다는 점이다.   


혁명의 논리와 치국의 논리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오히려 메이지 유신 이후 하기는 버려졌다. 흐름에서 소외된 쇼카손주쿠에서도 후배들을 주축으로 반락이 일어난다. 이미 성공한 선배들은 이를 강하게 진압한다. 쇼카손주쿠를 이끌었던 요시다 쇼인의 삼촌도 책임을 느끼고 할복했다. 그 외에도 그의 많은 친족들이 화를 입었다. 그래서 이 지역이 정신적 고향으로 다시 호명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하기를 생각하면 묘하게 아련하다. 어떤 여행지를 회상하며 느끼는 감정으로서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오래된 시골 거리를 걸으며 했던 생각들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 같다.   


여행기의 하기 편을 이렇게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 도자기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기야키(萩焼)라고 하는데 공예 제품으로는 일본에서 알아주는 도자기다. 요즘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지역마다 모두 나름의 고유한 특산품을 갖고 알리기 위해서 난리다. 그런데 하기는 다행히 콘텐츠가 많은 것 같다. 동네에서도 꽤 하기야키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자기 집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일본 도자기의 시작이 다 그렇듯이 역시 이는 임진왜란의 산물이다. 이 지역 영주도 당연히 전쟁에 참여했고 조선의 도공을 일본으로 데려와 가마를 만들게 명령한다. 그 결과 투박한 형태의 다기가 이곳 전통으로 남았다.

하기야키 도자기 가게 @촬영

얼마나 이 땅이 우리와 가까운지 알게 한다. 일본을 섬나라라고 말하지만, 어느새 내가 사는 나라도 사실상 섬나라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바다 건너에는 머나먼 곳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산다고 여길 때가 있나 보다. 동해를 바로 건너 이곳에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잔뜩 있었다.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지만, 그 거리감을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번 야마구치 여행의 개인적인 소감이다.   


동해는 이 땅과 한반도를 잇기도 단절하기도 한다. 혹시나 다음에도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생긴다면 꼭 때와 시간을 맞춰서 수영복까지 준비해서 와야겠다. 바다를 그렇게나마 더 느껴보고 싶다.   


사실 이번 여행은 인생이 뜻대로만 풀리지 않아 시작했던 여행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세상이 내 것 되리라 생각했는데 훨씬 복잡했다. 그래서 마음을 한번 환기하고 싶었다. 물론 어렵고 내가 잘 안될 때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래도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3. 두 가문 이야기 (야마구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