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작한 여행이 거의 끝나갔다. 얼마 전 히로시마 공항에 인천으로 매일 운항 노선이 생겼다. 덕분에 이렇게 시모노세키에서 시작해서 서쪽부터 동쪽으로 샅샅이 훑을 수 있었다. 동선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야마구치에서 히로시마로 지역 경계를 지나자 분명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대중교통에 서양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았다. 야마구치에서는 돌아다니면서 나 말고 다른 관광객은 보지 못할 때도 많았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된 국가다. 그래서 시골에서 노인들만 있는 버스나 기차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히로시마는 분명한 대도시다. 거의 먹통이었던 구글 맵도 교통 정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히로시마는 인구가 백만이 넘는다. 보통 일본에서 인구순위로 10위 정도 위치한다. 한국에 빗대면 전주 정도 지위를 가진 도시다.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중심 도시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지역 거점 도시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여행에 있어서는 히로시마만의 맛이 살아있다. 흔히 생각하는 바다를 배경으로 달리는 노면전차의 모습은 히로시마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삼각주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에 지하철을 건설하기 어렵기에 대신 노면전차가 발달했다고 한다. 덕분에 도시 전경 사이 사이로 여러 겹의 강들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탑승해서 돌아다니기에는 조금 정신없지만 자유여행객에게는 덕분에 도시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누군가 여행지로서 이 지역을 추천한다면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나라면 식사를 꼽을 것 같다. 풍요로운 지역이기에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요리를 시도 해볼지 매끼 두근거렸다.
당장 히로시마에 오기 전날, 야마구치 숙소에서 먹은 것이 ‘가와라 소바(瓦そば)’다. 말 그대로 기왓장 위에 올려 먹는 메밀국수다. 이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어서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한국에도 꽤 알려져 있다. 어느 온천 료칸에서 개발한 것인데,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원래 전통이라는 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음식에는 멋들어진 전설도 덧붙여져 있다. 일본 최후의 내전인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당시 병사들이 포위전에 나섰다. 그때 땅에 떨어진 기와에 메밀국수를 올려 먹은 일화에 최초 개발자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일단 독특한 모습에 사진부터 찍고 젓가락으로 면발을 들었다. 입에 넣어보니 독특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기왓장 부분에 닿아있는 국수 아랫부분은 잘 구워져서 아삭거린다. 하지만 윗부분은 메밀국수의 쫄깃함이 남아있다. 위에 올려진 고명까지 한꺼번에 집어서 소스에 찍어 먹는다. 또 다른 일본 음식인 야키소바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구운 면은 잘 먹지 않아서 그런지 제법 새롭다.
그래도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를 포함해서 이 지역 음식의 매력은 역시 해산물이다. 나 역시도 히로시마에 들어서서 처음 먹은 것이 굴이었다. 미야지마 섬을 돌아다니다 보면 노점에서 서서 먹을 수 있게 간식으로 팔고 있다. 히로시마도 굴 양식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으로 400년이라 하니 역사도 길다. 지금도 일본 전체 굴 생산량의 60%를 차지한다.
굴을 즉석에서 구워서 레몬 폰즈소스를 올려준다. 길거리에서 외국인들까지 모두 줄 서서 후루룩 삼킨다. 사실 한국에서 먹는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저렴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원래 굴은 고급 음식이다. 통영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굴 산지이기에 한국에서 유독 굴이 저렴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텔에 들어서서 짐부터 풀어놓고 밖으로 나섰다. 히로시마에 와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은 그럼에도 굴이 아니다. 바로 오코노미야키다.
사실 오코노미야키는 한국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어서 일본식 빈대떡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코노미’는 취향이란 뜻이고, ‘야키’는 굽는다는 뜻이니 취향껏 구워 먹는 요리다. 그래서 사전적인 의미로는 주인장 마음대로 만드는 ‘오마카세’와 반대다. 그렇기에 오코노미야키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 중 크게 오사카식과 히로시마식으로 나눌 수 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이 오코노미야키를 어떻게 먹는지, 그리고 어떤 취향인지에 따라 논쟁이 벌어진다고 한다.
흔히 알고 있는 오사카식 오코노미야키는 재료를 섞어 반죽을 통째로 굽는다. 반면에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는 층층이 쌓아서 철판 위에 올린다. 그리고 쫄깃한 면이 대신 들어간다.
위험한 발언이지만, 둘 다 좋아하고 먹어본 내 경험상 히로시마식의 편을 더 들어주고 싶다. 그 음식만의 먹는 재미가 더 있기 때문이다. 층층이 쌓아져서 구워진 재료들을 차례로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마치 한 판의 오코노미야키를 먹더라도 다른 맛을 매번 느끼게 된다. 더구나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는 다른 곳에서는 접할 기회 자체가 잘 없다. 그래서 그 희소성도 비교 저울 위에 올려주고 싶다.
호텔 앞 가까운 오코노미야키 식당에 들어갔다. 히로시마는 총본산이다 보니 쉽게 오코노미야키 맛집을 찾을 수 있다. 본래 긴 줄을 서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집이라는데, 운이 좋아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종업원에게 혼자라고 말하니 요리하는 철판 앞에 앉혔다. 어차피 다른 자리도 합석이기에 오코노미야키 만들어지는 것이라도 구경하는 편이 낫다. 식당 안을 둘러보니 모두 저마다 맥주잔 하나씩을 옆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니 꿩 대신 닭이라고 맥주 대신 콜라다. 철판 앞자리는 본래 요리하는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를 끝내는 분위기다. 나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기는 하는데 아쉽게도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는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이 이럴 때는 정말 아쉽다. 학창 시절 교과 시간에 몇 마디 배운 것은 같은데 기억나는 것이 없다.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로도 먹는 것인데 그걸 다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 날 출국 직전에 먹은 음식도 빼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붕장어 덮밥이다. 아나고메시(あなごめし)라고 한다.
히로시마 지역 가정식이라며 어머니의 손맛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기차역의 도시락 때문에 유명해졌다. 붕장어 덮밥은 미야지마 역에서 파는 에키벤에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일본 특유의 도시락 문화는 설명할 것도 없다. 그중에서 기차에서 먹는 도시락인 에키벤은 역사도 오래되었고 지역마다 제 각각이라 마니아까지 존재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기타큐슈에 있는 큐슈 철도 역사 박물관에 가보니 에키벤을 파는 상인 등신상까지 있었다.
어차피 여행 마지막 날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가진 모든 엔화를 털어서 좋은 식당에 갔다. 평소 내 여행 스타일이라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비싼 곳이었다. 상점가에 있는 식당이라 입구는 좁지만, 들어가보면 긴 공간이 있었다.
따뜻한 밥 위에 올라간 장어는 잘 손질되어 있었다. 생선까지 한꺼번에 떠서 입에 넣으니, 간이 딱 맞았다. 늘 일본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 놀라는 점은 밥이 참 맛있다는 것이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일본의 쌀농사 시스템은 이미 양보다 질을 목표로 시작했다고 한 내용을 보았다. 그런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숟가락 없이 젓가락으로만 먹는 식사가 불편할 법도 한데 여행하는 동안 익숙해졌는지 거슬리지 않았다.
현지식을 먹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를 먹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꼭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으러 다닌다. 그런 점에서 히로시마는 100점 만점의 100점이었다.
잠시의 여행으로 그 나라 문화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넓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이 관광(觀光)에만 그친다. 풍광만 보고 간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그것에 더해 내 세계를 조금 더 확장하고 싶다.
여행 도중 들린 호후 시에는 일본의 3대 텐만구(天満宮) 중 하나로 꼽히는 신사가 있다. 그냥 호후텐만구라 불린다.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아니었지만, 들릴 기회가 있었다.
텐만구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라는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시설이다. 시인이자 관료였던 그는 국풍 문화를 이끌었으나 권력다툼에서 패배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머나먼 큐슈 땅으로 유배 떠난다. 그런데 죽은 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뇌신(雷神)이 되어 국가의 재난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달래기 위해서 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낸 뒤에야 재난이 멈췄다. 그래서 서일본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그 신앙이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이러한 일본의 신앙을 한국과 비교하여 디테일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모두 그저 기복 신앙의 일종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신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제사를 지낸다면, 일본은 재난을 피하고자 제사를 지낸다.
일본의 신들은 기본적으로 재앙신이다. 어느 종교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렇기에 그 신들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면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그 흔적이 어쩌면 일본 종교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남을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기에 신과 교류하며 부정한 것을 씻어내고, 세상에 다시 정화를 가져다 달라고 기도한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는 그들의 삶이기에 종교가 이렇게 현세적인 생활양식의 일부로 남은 것 같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그런 텐만구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공부를 잘하게 해주고 시험에 합격시켜 준다는 영험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수능 철만 되면 전국의 교회, 성당, 절이 가리지 않고 사람으로 가득 찬다. 이곳 텐만구도 다르지 않아 일본에서도 시험 철만 되면 북적인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갔을 때는 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수험생이 찾지 않아 신사 내가 한적했다. 제법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믿는다는 ‘공부의 신’에게 기도 하나 남겼다. 내용은 이제 나는 나이도 찼으니 공부 그만 좀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에는 나름의 가르침이 있다. 그리고 그걸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치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는 사랑이나, 불교에서는 자비심이 그렇다.
일본 신도(神道)에는 그 자리에 ‘마코토(誠)’가 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심’ 혹은 ‘정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명저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도 관련하여 기록을 남겼다. 미국에 사는 일본 이민자들이 그 자식 세대가 근성이 없는 것을 보고, 이제 마코토가 없다고 투덜거렸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렇듯 마코토는 일본적인 정신이자 가치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스승인 요시다 쇼인조차 마코토를 이루는 것이 사무라이라며 중시했다.
이 마코토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일을 몰입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지성이면 감천이다. 일본인 특유의 장인 정신과 맞닿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등 재해가 가득한 이 세상을 사는 일본인에게 신을 달래고 소통하는 방법은 다름이 없었다. 그저 자기 일을 맡은바 해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의문 갖지 않는 것. 그것이 일본의 정신이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위대한 일을 하고 싶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부터 정리하라”는 연설을 들은 적 있다. 나는 처음에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저런 비논리적인 말을 하나 반발심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삶의 방식에도 일종의 신성함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일본 여행을 하면 깨끗한 길거리와 친절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제는 그사이 공기를 떠다니는 마코토를 상상하기도 한다.
여행 마지막 날, 나의 노란 캐리어를 끌고 히로시마 시내로 나갔다. 노면전차를 타고 들린 곳은 먼저 버스 터미널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예매하기 위해서다. 미리 비행기 시간에 맞춰 표를 끊었다. 그리고 가져온 짐을 모두 대여 사물함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왔다. 사야 할 기념품이나 선물은 미리 사두었기 때문에 약간 짐이 늘어나 있었다. 그래서 약간은 시간이 있었다.
버스 터미널 바로 앞에 히로시마 평화공원이 있다. 사실 이곳에 이렇게 서양인 관광객이 많은 이유일 곳이다. 일본 어디나 이제 관광객이 많지만 유독 서양인 비중이 높은 동네다. 그들은 모두 여기서 세계에서 최초로 핵무기가 투하된 도시를 보기 위해 왔다.
‘원폭 돔’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보인다. 이제는 이곳 평화공원 뿐만 아니라 히로시마 도시 전체를 상징하는 시설이다. 최초에는 상업전시관이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 이곳에 원자탄이 떨어졌다. 주변이 온통 폐허로 변해버렸어도 이 건물만은 반파된 형태가 남아있다. 이는 오히려 폭격 지점이 전시관 바로 위였기 때문이다. 핵폭발 이후로 산소를 태우고 밀려 들어오는 공기 충격파에 주변은 쓸어버렸지만 바로 아래 건물은 피해가 덜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철골과 시멘트가 아직 남았다는 것이고, 당시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폭발이 터지는 순간 열에 의하여 사실상 모두 즉사했다.
건물 주변에는 수많은 종이학을 볼 수 있다. 당시 핵폭발 낙진으로 백혈병이 걸린 소녀 이야기 때문이다. 그녀는 1,000마리 종이학을 접으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으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종이학은 반핵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 원폭 돔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다. 선정 과정도 다사다난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세계문화유산을 유네스코에 신청했을 때 핵무기를 사용했던 미국은 반대했으며, 중국은 전쟁을 일으킨 반성은 없다며 기권했다. 지금도 일본 내부에서도 원폭 돔은 가끔 논란의 중심에 선다. 끔찍한 기억을 보존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관광객들이 찾게 되었지만 달갑지만은 않은 기억일 것이다.
최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 하여 어두운 역사를 살펴보는 흐름이 있다. 재해지나 참상이나 폐허가 보통 그 대상이 된다. 사실 당사자들이 여기에 저항하는 때도 많다. 우리는 모두 남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만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한국인에게 솔직하게 말해서 히로시마는 꺼려지는 공간이다. 이 감정적인 반응은 히로시마를 여행지로서도 그리 선호되지 않는 결과까지 낳는다. 극단적으로 말해 일본이 피해자 행세를 하는 그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아시아를 식민화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핵무기의 버섯구름은 해방을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 대해서 오히려 인과응보로서 통쾌해하는 심리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굳이 찾은 이유가 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여길 마지막 도착지로 생각했다. 당시 군항과 군수공장이 있었던 히로시마 인구의 최대 1/3가량이 한국인이었다고 추산된다. 그렇기에 원자탄 투하 피폭자 20만 명 중 5만 명 정도가 한국인이었다.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나 이와 관련된 논쟁은 그간 크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중략) 원폭은 해방을 가져왔고 피폭의 경험은 독립에 수반되는 여러 나쁜 부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오은정 발언 재인용, "원폭 피해, 끝난 일 아닌 식민지 수탈 상처", 박종완, 경남도민일보, 2017.10.
그렇기에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미국, 일본, 심지어는 한국 3개국 모두에게서 외면받았다. 어느 쪽도 핵무기가 사용된 그곳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공원의 한쪽 공간, 그곳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재일한국인들 사이에서 먼저 추모 운동이 있었다. 히로시마 시장에게 의견을 구했고 호의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안에 세울 수 없었으나, 일본 시민사회의 도움과 함께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있게 되었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워진 모습이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으로 익숙하다. 일부러 한국에서 제작하여 가져왔다고 한다.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삼다수’ 생수병을 꺼냈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준비해 왔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날 사서 여행 내내 캐리어 한쪽에 잠자고 있던 녀석이다.
보통 추모를 위해 술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원폭 희생자들의 경우 그저 생수를 따르는 것으로 대신한다. 핵무기의 경우 피폭 순간 온몸의 수분이 증발하기 때문에 엄청난 갈증을 느끼며 고통 속에 사망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했을 한 모금의 물을 올린다. 이미 제단에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해,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웠을 고향 땅의 물을 가져다 놓은 분들이 많았다.
위령비 앞에서 어느 미국인 여성 관광객과 일본인 자원봉사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투어 중인 모양이었다. 영어로 자원봉사자가 이 위령비에 관해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한국인 추모비에요. 원폭 희생자 중에 20% 정도가 한국인이었거든요.”
“오. 아마도 히로시마가 한국 부산에 가깝기 때문인가 보죠? 야마구치나 히로시마에 한국인들이 많이 살았다면서요.”
일본인 자원봉사자는 설명하기 어려운 듯 말을 얼버무린다. 글쎄, 그를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만의 맥락을 전달하는 것은 늘 힘든 일이다.
생수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 먼저 마시고 제단 위에 올렸다. 다행히 아마 다른 많은 한국 분이 올려놓은 것이 많아 제법 풍성해 보였다. 혹시나 내 생수병 하나만 덜렁 놓여있을까 걱정도 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위령비 앞에서 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미국인 관광객이 알 수 없는 감명을 받았는지 절하는 나를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녀의 여행 갤러리에 내 모습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볼 일을 마치고 평화공원을 나서며 당시 일본 제국 1억 명의 마코토를 생각했다. 모두 그저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마코토들이 모여 만든 결과는 재난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인류가 처음 만나게 된 참상으로 이어졌다.
여행을 모두 마치고 히로시마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짧은 감상을 노트에 적었다. 다시 짧았던 일탈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늘 이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오히려 강하게 든다. 짧은 휴식이었기에 그런 기분이 든다면 보람찼기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는 그 일본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우리 관심에서 멀어진 지역이었다. 짧게나마 여행하면서, 이웃 나라에 대해 잠시나 시간을 내어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이란 계기가 아니었으면 나라 밖에 관심을 가지기 쉽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짧게나마 그곳에서 추억을 갖게 되었을 때 이제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잠시 세상살이가 풀리지 않아 떠났던 여름은 끝났다. 서른 살의 여행은 앞으로 있을 마흔 살의 여행, 쉰 살의 여행과 다를 것이다. 서른 살의 여행이 어땠는지 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기기 위해서 여행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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