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녕, 내일 또 만나>, 깊고 넓은 그 평행우주의 세계
안녕, 내일 또 만나 (So Long, See You Tomorrow)
감독: 백승빈
2023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안녕, 내일 또 만나>.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4615
영화 <안녕, 내일 또 만나>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처음 상경하였을 때 넓은 세상과 다양한 삶의 형태를 마주하면서 나는 놀랍고도 혼란스러운 경험을 했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특성화 고교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특성화 고교 같은 게 없었으니까. 예술 고등학교가 하나 있긴 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 학교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그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을 마주쳐본 적조차 없다. 그런 '특수'한 학교는 유별나고 특이한 학생들만 다니는 곳인 줄 알았다. 나는 그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남들이 다 겪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는 게 삶의 유일한 경로이자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좁은 지방의 소도시를 벗어나 서울에 왔고 그 시절의 나는 연속적인 충격에 부딪혀야만 했다. 다양한 출신, 다양한 배경,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 나는 대학에 와서야 특성화 고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수도권의 특성화 고교를 졸업한 내 동기들은 그곳에서 프리미어나 베가스와 같은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고 그랬다. "국영수만 죽어라고 파도 인서울을 할까 말까"라는 소리를 주야장천 들어왔던 나의 학창 시절과 그들은 완전히 달랐다. 국영수와 함께 영상 편집을 배워도 인서울은 할 수 있었다. 나는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강북과 강남을 오가며 한강을 바라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이런 풍경을 보면서 자랐겠구나. 크고 멋진 건물들. 번쩍이는 조명. 시끄럽고 붐비지만 한편으로는 활기찬 거리와 찬란한 문화들. 강변에 잘 조성된 공원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도시 구석구석 어디에나 갈 수 있는 편리한 교통수단까지. 나는 억울했다. 나도 이 큰 도시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배우고 자랐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무언가 더 크고, 더 원대하고, 더 대단한 꿈을 품지 않았을까? 아예 한국을 떠나 더 넓은 세계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특성화 고교나 예술 고등학교와 같은 학교들에 더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다양한 삶의 경로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영화 <안녕, 내일 또 만나>는 '세상의 모든 만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만약 그랬더라면.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내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랐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떠할까.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그래서 무척 넓고, 또 다른 내 삶의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 평행우주, 지금 내가 존재하는 우주가 아닌 또 다른 어느 우주 속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나보다 그가 더 잘났을까, 더 못났을까. 더 잘 살고 있을까, 더 못 살고 있을까. 더 찬란할까, 더 비참할까. 주인공 동준은 '지금의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이 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삶'을 계속해서 저울질한다. 평행우주 속의 동준의 삶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평행우주를 꿈꾸며 더 나을 수 있었던 내 삶의 다른 가능성에 황홀하게 젖다가도, 한편으로는 지금 내 삶의 어느 일부는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구질구질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눈물 나게 행복했던 찰나의 순간들. 지치고 힘든 나를 버티게 해 준 사람들. 소중한 사람과 나눴던 소중한 이야기들. 감명 깊게 읽은 책 몇 가지와 시의 구절. 평행우주의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만약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나는 그곳으로 흔쾌히 떠날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소중한 일부들이 모두 대체된 그 평행우주로 미련 없이 나는 떠날 수 있을까? 아무리 지금의 내가 힘들고, 그곳의 내가 더 낫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느 우주에 존재하는 '나'이더라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삶의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와의 만남, 누군가와의 대화, 누군가와의 사랑. 넓고 깊은 우주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단 하나의 순간. 단 하나의 사람. 대구에서도,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동준은 엇비슷하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만, 그 모든 경우의 수에서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동준의 평행우주와 나란히 존재하는 그. 평행하여 발을 맞추어 함께 걸었던 그 사람. 위태롭게 경계를 거닐며 세상을 향해 저항했던 한 사람. 동준의 우주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주는 넓고 첫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hiphops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