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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석영 Jul 13. 2018

역사교사, 애국을 말하다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 무엇이 애국인가?

‘애국’을 위한 역사교육의 탄생


‘애국(愛國)’. 사전적 정의로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 혹은 행위’를 의미합니다. 역사교사인 저에게 있어 이 ‘애국’의 개념은 특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愛國心)’이로 역사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국’은 무엇이며 많은 사람들이 왜 애국심이 역사교육의 목표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역사라고 하는 학문은 사실 지금과는 다르게 모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는 치자(治者)의 학문으로, 제왕학(帝王學)의 일종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국가가 흥하고 망했는지를 배워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나 계급이 타파된 지금에는 모두가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학교에서 역사 관련 과목은 반드시 가르쳐야 할 과목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지배층들만이 배우던 역사가 모든 사람들이 배우는 과목으로 변모하게 된 것일까요?


 계급이 있던 사회에서는 귀족들의 국가와 평민들의 국가, 그리고 노예들의 국가가 따로 있는 것과 다름없었죠. 그들의 일상은 너무나 달랐으니까요. 오로지 상위 계급만을 위해 모든 국가의 정책이 정해지고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국가를 위한다.’라는 개념이 성립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계급이 다르므로 ‘우리는 하나다!’라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던 것이죠. 여러 차례의 혁명으로 계급 사회가 점차 타파되었습니다. 관념상으로 대부분의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국가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모두 ‘하나’라고 느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었죠. 그러나, 이로는 부족했습니다. 국가의 구성원, 즉 국민들이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여러 장치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장치 중 하나가 ‘공교육’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돈이 있는 귀족층들만 받던 교육을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의무적인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는 의식을 교육을 통해 기르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의 비용으로 여러 지역에서는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국가에 필요한 인재로서의 능력을 갖추고, 국가에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이들을 길러낼 수 있는 교과목들을 선정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역사’였습니다. 국민들이 ‘과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가 되어오고 있었으며, 우리는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결속체이다.’라고 느끼게 하는 데에는 이 ‘역사’가 적합해보였던 것이죠. 역사를 가르침으로써 소속감에서 더 나아가 ‘국가를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애국심을 가진 이들을 길러내고자 한 것이죠.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때문에 역사교육의 중요 목표 중 하나가 ‘애국심의 고양’이 된 것이죠. 특히 여러 역사 중에서도 국민 통합과 애국심의 고양을 위해 자국사가 강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역사보다도 ‘한국사’, 즉 ‘우리의 역사’를 강조하고 여기에 친근감을 더 느끼는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사 교육’이 마치 ‘역사 교육’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애국’을 상상해야 할까?



2016년 하반기는 단연 그 규모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이른바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 간의 대립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촛불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저는 역사교사로서 ‘애국심의 고양’이라는 역사교육의 목표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생들이 나라를 사랑하여 국가라는 공동체가 가치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수업을 할 때마다 “‘애국愛國’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야할까?”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고민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애국’이라고 칭송을 하기도 하고, 다른 편에서는 ‘매국(賣國)’이라고 평가합니다. 예로써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길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는 것에 대해 어느 한 편에서는 이것이 바른 사회를 만들어가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이야기하고, 한 쪽에서는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을 들 수 있겠네요. 이러한 서로 다른 ‘애국’에 대한 생각들 때문에 저는 ‘애국’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애국’의 의미를 받아들여야하는가?”, “우리는 어떤 ‘애국’의 모습을 상상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학생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때에도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페이스 북 국방부 페이지에서 스크랩한 ‘예비군 인증샷’ 사진들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애국’들을 마주칩니다. 교실에는 항상 국가를 떠올리게 하기 위해 학생들이 보는 정면 칠판 위에 태극기가 걸려있습니다. 각종 학교 행사에서는 항상 식전 혹은 식후에 애국가를 제창하고 호국 열사들을 기리는 묵념을 합니다. 한-일 축구전이 열릴 때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응원을 합니다. 올림픽 등의 큰 대회에서 한국의 대표선수가 메달을 획득하면 우리는 뿌듯함과 감동을 느낍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고 ‘독도는 우리 땅!’을 외칩니다.


 위와 같은 일상적인 애국 중에 저는 최근 상당히 우려가 되는 ‘애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2015년 북한의 연속된 도발로 남북 관계가 전쟁 직전의 국면으로 치닫을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 SNS에서는 예비군들을 중심으로 일명 ‘개구리 마크’가 붙어있는 전역모와 전역 군복, 그리고 군용 워커, 고무링 등을 사진을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전쟁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이 쯤이면 북한을 혼내줄 때가 되었다.’는 등의 문구와 함께 게재한 게시물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너희들은 화장이나 하고 있어, 나라는 오빠가 지킬게.”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이 군복을 입은 사진을 올린 예비군이 알고보니 공익근무요원 출신이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게시물들을 취합하여 대한민국 육군 SNS 페이지에서 ‘자랑스러운 예비군의 모습’으로 그려내며 애국심의 한 사례로 홍보를 했습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 아이. 바닷가에 시신이 떠내려왔다.


 경악스러웠습니다. 게시물을 올린 예비군들은 아마 대체로 저와 비슷한 나이 대의 청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전쟁의 비참함과 잔인함을 직접 알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매체들을 통해 충분히 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SNS를 통한 ‘예비군 인증샷’ 사진들을 보며 생각난 포스터들. 전쟁의 상황 속에서 미국을 위시로 한 여러 국가들은 ‘국가는 너를 원한다.’, ‘국가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묻기 전에, 너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어라.’ 등의 표어를 만듦으로써 국민들의 국가를 위한 희생은 숭고하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해인 2015년, 세계를 울린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내전에서 발생한 난민 아이의 시신이 바다로 쓸려 내려와 아이가 눈을 감은 채로, 엎드려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전쟁의 가장 잔인한 모습은 아마 ‘가능성의 말살’일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눈을 감고 있던 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아이를 죽임으로써 가능성을 없애버렸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박탈할 뿐입니다.


 같은 해에 지구 한 편에서는 전쟁의 비참함에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한 편에서는 ‘애국’을 위한 전쟁을 외쳤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함께 반드시 수업 속에서 과연 어떤 모습이 바람직한 애국의 모습일지를 같이 생각해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속, 두 인물 – 하세가와 데루, 오노다 히로



 저는 동아시아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사 과목은 한국사 과목에 비해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의 역사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던 인접 국가들의 역사적 사건의 경과를 지켜봄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타자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때로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가려져 무언가 보아야할 것을 놓치거나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반면 동아시아사에서 등장하는 인접국들의 역사는 ‘남’의 역사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감정을 배제한 채 역사를 바라봅니다. ‘남’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와 비교해봄으로써 ‘남’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남’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결국 연결된 것이고 상호작용을 해왔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더 넓은 ‘우리’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사의 근현대 부분에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상당히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이 주제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피해와 인권 유린의 장면들을 배우게 됩니다. 동시에 이러한 전쟁의 상황 속에서도 반전과 평화를 외쳤던 다양한 목소리와 평화를 위한 국가를 뛰어넘은 국제 연대의 사례들 또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중 눈에 띄었던 것은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하세가와 데루의 모습


 다시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인물은 ‘하세가와 데루( )’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교과서에는 한 줄 정도로 아주 간략하게만 나와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너무나 생소한 인물이어서 일단 책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라는 책에서 하세가와 데루에 대한 정보를 조금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그의 전반적인 일대기에 대해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하세가와 데루는 중일 전쟁 당시 일본인으로서 중국에 건너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며 반전운동을 펼쳤던 여성입니다. 하세가와 데루는 학창시절부터 남들이라면 겁나서 보지도 못할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의 책을 친구들에게 권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학창 시절 이후에도 하세가와 데루의 행보는 굉장히 특이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짐승과 같은 존재로 무시하고 있던 ‘중국인’이었던 류런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두 부부를 연결시켜 주었던 것은 에스페란토어라는 인공 언어였습니다. 에스페란토어는 자멘호프라는 박사가 만든 언어입니다. 그는 유럽에서 발생하는 각국 간의 분쟁들이 서로 다른 언어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언어를 창안하고자 에스페란토어를 만든 것입니다. 이후 에스페란토어는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했던 하세가와 데루와 류런은 에스페란토라는 언어를 사용하였고, 이를 널리 사용하자는 운동 중에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죠.


 그러나 중국에서의 결혼생활은 행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중일전쟁을 때문이었습니다. 하세가와 부부는 일본의 대도시 점령에 따라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눈 앞에서 죽어갔고, 하세가와 데루는 무엇보다 자신과 같은 일본인이 자신의 남편과 같은 중국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국가를 떠나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일본의 편이 아닌 중국의 편에 서길 다짐합니다. 이후 하세가와는 그 남편과 함께 중국 국민당 국제 홍보부에서 활동하며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전쟁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반일 방송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방송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전쟁 중에 있는 일본 병사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 원하신다면 저를 매국노라 불러도 좋습니다.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타국을 침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죄 없는 난민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국민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욱 큰 수치입니다!”



“일본의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이 전쟁을 철저히 성전이라 배워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이 전쟁은 대자본가와 군부의 야합 연대인 군사 파시스트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으킨 침략전쟁인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여러분의 가족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에 실제로 많은 일본 병사들이 그녀의 방송에 마음이 동요되었고,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하세가와 데루의 행동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그녀를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매국노’라 공격하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살해 위협을 하는 등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 또한 자신의 딸을 비난하는 언행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1947년 낙태로 인한 감염으로 중국 땅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이 인물의 일대기는 ‘애국’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위한 소재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세가와 데루는 분명 당시에 ‘매국노’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과연 매국이었을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인물만으로는 무엇인가 수업을 구성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비슷한 시기에 일본인으로서 하세가와 데루와는 전혀 다른 반대 방향의 길을 걸었던 인물을 찾아 이를 하세가와 데루의 삶과 대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민을 하던 중, 학부 시절 일본사 강의에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을 한 뒤에도 항복을 하지 않고 어떤 외딴 섬에서 전투를 벌였던 병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던 기억이 났습니다. 인물의 정확한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리저리 찾던 중 강의에서 들었던 인물의 이야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인물은 ‘오노다 히로()’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소위 계급을 가진 일본제국군 부대의 정보장교였습니다. 그의 작전 지역은 필리핀의 ‘루뱅()’ 섬이었습니다. 그는 1945년 2월 연합군이 루방 섬을 점령할 때 자신의 부하 세 명과 함께 정글 깊이 숨어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정글 속에서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함께 이 정글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자신들은 전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장장 전쟁이 끝나고 2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그들은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하라’라는 무수히 많은 선전물과 방송을 접했지만 이것은 적들이 자신들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전쟁 임무 수행’이라는 명목하에 식량을 탈취하기 위해 민가로 내려와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필리핀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오노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관리와 함께 오노다의 가족들을 파견하여 그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그는 이 역시 그들의 적이었던 연합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부하들도 도망을 가거나 하나, 둘 약탈과정에서 일어난 필리핀 지방 순찰대와의 교전에서 사망하였고, 그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혼자의 몸으로 정글에 숨어 계속해서 ‘전쟁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항복’ 당시의 오노다 히로의 모습


 종전 30년 째가 되는 1974년 겨울, 스즈끼 노리오라는 사람이 이 오노다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루방 섬으로 가 오노다를 찾았습니다. 스즈끼는 오노다가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스즈끼는 오노다에게 이제는 항복을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오노다는 자신은 군인으로서 직속 상관의 명령에 따라 항복을 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의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서점을 운영하고 있던 그의 전 직속상관 중  다니구치 요시미가 필리핀으로 와 투항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오노다는 1975년 전쟁이 끝난지 30년만에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투항을 할 때도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허리춤에는 일본도와 수류탄을 차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소총과 탄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필리핀 대통령의 사면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하였습니다. 22세의 청년이 52세의 중년이 되어 일본에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그는 ‘대동아전쟁’에서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군인 정신을 지킨 ‘마지막 황군’으로서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국민들은 그에게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며 열광하였고, 일본의 극우파들은 ‘오노다는 진정한 사무라이’라며 추켜 세웠습니다. 전쟁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후 브라질에서 목장을 운영하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우익운동가로 활동하며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 난징 대학살을 조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2014년 1월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오노다 히로는 일본의 우익 진영에서 ‘애국’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이 인물은 당시 뿐 아니라 30년이 지난 이후에도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의 선택, 그리고 그들이 살아있을 당시 받았던 그들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비교하여 바라본다면, 학생들과 저는 보다 바람직한 애국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들었습니다.


     


‘애국’을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 - 『맨발의 겐』


『맨발의 겐』 중 한 장면. 겐의 형인 고오지가 군대 지원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집을 뛰쳐나가고 있다.


 중일 전쟁과 아시아·태평양 전쟁 속 서로 다른 선택과 믿음을 보였던 두 인물인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를 소재로 한 동아시아사 수업 활동지를 구상하다가, 문득 교사가 된 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텍스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맨발의 겐』이라는 만화였습니다. 이 만화의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는 유년시절 히로시마에 살다가 피폭을 당해 가족을 잃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피폭 전후 상황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즉, 자전적 만화인 것입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겐’입니다. 겐의 아버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반대해 반전운동을 펼치던 인물이었습니다. 전쟁이 극에 달하며 겐의 가족은 겐의 아버지의 ‘매국’ 행위 때문에 ‘비국민’으로 간주되어 사회 활동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겐의 가족은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중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집이 무너지고 겐의 아버지, 누나가 무너진 집에서 죽게되고 겐은 어머니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겐과 겐의 어머니는 ‘삐까병(삐까란, 일본어로 “반짝이다”라는 뜻이다. 삐까병은 피폭을 당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을 하나의 전염병으로 생각한 피폭을 당하지 않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걸린 환자 취급을 받으며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겐의 어머니는 피폭자에게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미군에 의해 생체실험을 당하게 되는 등 갖은 고통과 수모를 겪다가 죽게 됩니다. 겐은 전쟁 고아로 살게되며 같은 처지의 고아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전쟁의 고통과 그 속에서의 작은 희망들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학생들이 이 작품을 접한다면 전쟁 속의 일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의 여러 장면 중에서 ‘애국’을 생각하는 수업과 부합하는 장면을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비국민’으로 분류되어 갖은 차별과 수모를 겪는 것을 참지 못한 겐의 형인 고오지가 군인으로 지원하겠다고 하며 반전 운동을 하던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고오지는 결국 집을 뛰쳐나가 군대를 지원합니다. 이를 활동지의 텍스트 중 하나로 제시함으로써 저는 학생들에게 ‘겐의 형이 보인 행위는 “애국적”인 행위인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상당히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기 위해 학생들은 ‘전쟁’과 ‘애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애국’을 생각하는 활동지



 총 3차시로 수업을 구상하고 이에 맞춰 위에서 발굴한 자료와 텍스트들을 이용해 활동지를 구성해보았습니다. 먼저 1차시에는 평소에 학생들이 생각하는 ‘애국’에 대해 점검해보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애국’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2차시에는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 전쟁,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에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교사가 제시한 글쓰기 활동을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크게 두 문제 정도를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하세가와 데루 이외에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였던 인물들의 직업, 활동 등을 요약해보는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위에서 소개한 『맨발의 겐』 중 고오지의 군대 지원 문제로 겐의 가족이 갈등을 겪는 장면과 피폭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을 제시하였습니다. 이후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전쟁은 존재하는가?’, ‘고오지의 행위는 애국적인가?’, ‘피폭을 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등의 발문을 옆에 같이 제시했습니다.


 3차시는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의 행위 중 무엇이 애국인가?’라는 토론 주제를 제시하고 조별로 학생들 간의 토론을 진행하고자 하였습니다. 토론의 깊이를 더하고자 토론 주제와 함께 ‘토론 팁’이라는 이름으로 생각해볼 질문들을 몇 가지 더 제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학생들이 서로의 생각을 적고, 토론 이후의 느낀점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칸을 제시했습니다. 부가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애국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일까?


∘ 국가가 명령하는 것에 잘 복종하는 것이 애국일까?


∘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전쟁은 존재하는가?


∘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전쟁이라고 믿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 전쟁이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홍보하는 정부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 이라크나 베트남에 파병되어 전투를 치른 우리 국군들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평가할 것인가?


∘ 나는 만약 전쟁 동원령이 떨어진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다음은 수업에서 활용하였던 활동지의 모습입니다.




































<1차시 활동지>







<2차시 활동지 읽기자료-1>






<2차시 활동지 읽기자료-2>








<2차시 활동지 읽기자료 요약과 문제 1>







<2차시 활동지 문제 2>









<3차시 활동지 질문들을 고려하여 토론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 쓰기>










<3차시 활동지 – 조별 토론 결과를 적고 토론에서 느낀 점 그림으로 그려보기>







애국가, 그리고 태극기



1차시 수업은 제시된 질문에 대해 조별로 모여 답변을 작성하고, 이를 발표해보고 이에 대해제가 피드백 및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에 제시된 질문들에 대해 학생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애국’의 사전적 정의를 찾고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던 애국의 모습을 찾기 위해 친구들과 활동지에 제시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해나갔습니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애국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개념 정의를 하기보다는 생각나는 인물들을 적고, 대답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여러 인물들을 대답하였지만, 그 인물들은 하나의 빗나감도 없이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더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들어야 명확해지겠지만, 이를 통해서 어렴풋하게 학생들이 생각하는 ‘애국’의 개념이 무엇과 맞닿아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독립, 자주, 민족이라는 개념과 ‘애국’의 개념을 비슷한 개념이라는 연장선상에서 함께 떠올리는 듯 했습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모두 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학생은 한 반에 두 세 명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 학생들은 자신이 애국가를 끝까지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수업 중 학생들끼리 오갔던 말 중에는 ‘야, 한국 사람이 애국가도 끝까지 못부르냐? 어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애국가를 끝까지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애국적인 행위라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저는 간략하게 애국가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처음의 애국가는 지금처럼 하나가 아니라 굉장히 여러 가지의 버전이 있었고, 대한제국 시기만 하더라도 10개가 넘는 버전의 애국가가 있었습니다. 대략의 내용은 ‘하늘이 황제를 보호해달라’는 내용으로, 당시 애국가는 나라가 곧 황제였다는 당시의 인식을 반영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가사의 애국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윤치호가 지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치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계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이며, 자신의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영어로 일기를 쓰면서 느낀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르는 가사의 애국가는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가락 위에 불러졌습니다. 학생들에게 올드 랭 사인 가락에 맞춰 애국가를 불러주니 굉장히 신기하다는 반응이었고, 몇 몇 학생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반주는 1930년대 안익태가 작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익태는 1930년대에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애국가 작곡과 함께 일본의 위성국가인 만주국의 영광을 노래하는 ‘만주 환상곡’을 작곡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적으로 안익태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저술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듣게 되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표정들을 지었습니다. 설명 이후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를 수 있으면 애국자일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수군수군대며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학교 칠판은 판서에 용이하게 위, 아래로 옮길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칠판을 최대한 위로 올리면 칠판 위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거의 다 가려집니다. 학생들에게 칠판을 최대한 위로 올려 태극기를 가린 채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태극기를 그릴 시간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상당히 끙끙거리고, 자신을 테스트한다는 느낌으로 태극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초가 흐르자 교실 여기저기에서는 ‘아, 뭐였지?’, ‘아, 이거 맞나?’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학생들이 거의 다 그렸다고 판단될 때 쯤 다시 칠판을 내렸습니다. 칠판이 내려가고 태극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탄식과 환호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태극기를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그리는 데에 성공한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구박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사실 태극기 안보고 그릴 줄 몰라.”라는 다소 충격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매번 태극기를 그릴 때 감, 리의 위치를 혼동합니다. 학생들의 눈빛은 아마도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말을 꺼낸걸까?’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뒤이어 “하지만 너희들보다 태극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선 조금은 더 알아.”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논란이 있지만,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제정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고종의 명으로 역관으로 이응준이 만든 태극기를 거쳐 박영효가 확정을 하였다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정설입니다. 그러나 태극기의 시작은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운요호 사건에서 일본 측의 ‘국기(國旗)를 내걸고 있는 우리의 배를 왜 공격하느냐?’라는 주장 때문에 조선은 처음으로 ‘국기’라는 개념에 대해 인지하게 됩니다. 이후 �사의 조선책략�으로 유명한 황준센이 ‘조선이 독립국이라면 마땅히 국기를 가져야한다.’라는 주장과, 마젠창이 ‘조선은 청의 속국이니 청의 황룡기를 변형한 청룡기를 사용하라’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국기 제작에 착수를 하게 됩니다.


박영효가 제작했다고 알려진 태극기의 모습


 그러나 국기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조선 사람이 국기를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응준이 고종의 명으로 그린 태극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청룡기의 사용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조선과 수교를 하겠다는 미국의 정책과 어긋난다는 말에 제작된 이 태극기는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처음 사용됩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4괘의 좌우가 반대였다고 하며, 태극의 굴곡이 훨씬 더 심했다고 합니다.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의 모습


 마젠창은 이에 대해 일본의 국기와 헷갈릴 수 있다는 이유로 태극 8괘도를 국기로 사용할 것을 강요합니다. 박영효는 수신사로 가는 일본의 기선 메이지마루호 위에서 선장이었던 제임스가 ‘8괘는 너무 복잡하니, 4괘가 낫겠다.’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이응준 태극기의 좌우를 바꿔 4괘를 확정지었고, 이 태극기의 모양이 공식적인 국기로 확정되어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공식 태극기를 제정한 박영효는 훗날 친일파가 됩니다.


 2010년 진관사라는 절에서 발견된 태극기는 굉장히 특이합니다. 사실 이 태극기는 일본의 일장기 위에 파란색 물감을 덧칠해 태극 무늬를 만들고, 검은 물감으로 4괘를 그린 것입니다. 현재의 태극기와 다르게 감, 리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도 합니다. 당시 진관사의 큰스님이었던 백초월 스님이 그린 태극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불에 탄 자국과 피가 물든 흔적은, 이는 이 태극기가 겪었을 고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태극기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아마 독립된 국가로서의 자아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인지도 모릅니다. 음양, 하늘, 땅, 물, 불의 조화라는 태극기의 뜻과 그것을 그릴 줄 아느냐의 문제보다 우리가 ‘태극기’라는 국가의 상징을 갖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가를 아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 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은 설명을 듣고 상당히 숙연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단순히 태극기를 맞게 그리고, 잘 못 그리고의 여부가 애국적인 것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학생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맹세문을 듣게 됩니다. 1차시의 마지막 질문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은 무엇이 다를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이 둘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들의 대답 중 “충성은 복종이라는 느낌이 강하고, 애국은 사랑한다는 감정의 느낌이 강하다.”는 내용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질문을 통해 학생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이 무언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1차시 수업으로 기존에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애국’의 개념에 대해 학생들이 의문을 품게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했습니다.      



학생들, ‘애국’을 생각하다



2차시 수업에서 학생들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과정,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의 일대기를 담은 텍스트를 읽고 주어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각 조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쓰는 지에 대해 확인하고 왜 그런 답을 썼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제가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사이토 다카오의 국회연설 장면


 첫 번째 질문은 하세가와 데루 외에 일본인이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 사람들에 대해 교과서를 참고하여 그들의 활동을 정리해보는 어느 정도의 정답이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지필평가를 내기 위한 용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무조건 반사처럼 각인되어 있는 ‘반일’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본 것이었습니다. 36년 간의 식민지배라는 역사는 식민지 잔재 청산이라는 과제를 낳았고, 이 과정에서 ‘반일=애국’이라는 다소 왜곡된 인식이 생겨나진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부 정치인들은 이러한 반일 감정을 이용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일본과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사이토 다카오는 중일 전쟁 당시 일본 민정당 소속의 중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중일 전쟁이 한창이었던 1940년 국회에서 중일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일부의 사람에 불과하지만 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전시 경제 체제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겪어야 할 사람들이 대다수임을 이야기하며 전쟁 반대를 외쳤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제명을 당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지도층에서도 분명히 전쟁에 반대하는 일본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비교적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비교적 알려져 있는 이유는 아마 조선인 박열 때문일 것입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에 있는 친척 집에서 7년 정도를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3.1 운동을 목격했는데, 이 일은 아마 그가 일본의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반제국주의를 외치며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던 도중 박열을 만나 함께 ‘흑도회’라는 단체를 조직합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그는 박열과 함께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는 대역죄로 구속되어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녀는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으나 그 내용이 담긴 문서를 찢어버렸고, 23살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자살을 합니다. 시신을 거두어 줄 사람이 없어 죽기 전,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옥중 결혼을 하였습니다. 가네코


후세 다츠지의 모습


후미코의 시신은 박열의 형이 수습하여 한국 땅에 묻히게 됩니다.


후세 다츠지는 일본의 인권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가들을 변호하는 데에 삶을 바친 인물입니다. 후세 다츠지는 박열의 변호를 맡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열단원이었던 김지섭이 일본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던 사건을 변론하기도 했습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 일본인으로서 사죄를 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2005년, 그에게는 일본인으로서 처음 독립유공자들에게 주어지는 건국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맨발의 겐� 중 제시된 장면을 읽고 질문에 대해 답을 작성한 학생의 활동지. 고오지의 행동에 대해 ‘애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애국을 행하는 형태가 잘못된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라에 헌신하는 애국이라는 껍질을 쓰고, 결국은 나라에 피해를 입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


 사실 학생들이 이 인물들의 활동을 찾고 요약해 적어보면서, 제가 의도한 방향대로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본인들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갈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상당히 다양한 답변들이 나왔습니다. 고오지의 행동이 애국적인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여 ‘나라와 국민을 위해 죽겠다고 했기 때문에 겐의 형이 한 행동은 애국이다.’라는 주장,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애국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 ‘애국은 자신이 무엇을 애국이냐고 믿느냐의 문제이므로 애국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 ‘국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희생자일 뿐 애국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 ‘애국이긴 한데 결국은 나라에 피해를 입히는 행동이므로 잘못된 애국이다’라는 주장 등 정말 다양하고 결이 다른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사실 ‘애국이다’, ‘아니다’ 정도의 간단한 답변만 나올 줄 알았는데 학생들이 생각보다 고오지의 행위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것 같습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전쟁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서는 압도적 다수의 학생이 ‘아니다’라는 반대의견을 내비쳤으며 전쟁은 모두에게 피해만을 남길 뿐이라고 적었습니다. 소수의 학생들은 타 국가로부터 침략받았을 때의 방어적인 입장에서의 전쟁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학생은 독립군의 예를 들며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전쟁은 존재한다고 적었습니다.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니 제가 오히려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개인적으로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전쟁이라는 것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방어적 전쟁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어적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가 외교 등의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원만한 합의를 보는 것이 진짜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학생들, 애국을 논하다


 한 학생의 토론 활동지. 자신의 주장으로 ‘하세가와 데루의 행위가 더 애국이다’라고 적었다. 학생은 ‘하세가와 데루의 행위는 나라가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라고 평가하고 오노다 히로의 행위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글에 숨은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3차시 수업에서는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의 행위 중 무엇이 애국인지에 대해 조별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어떤 토론보다도 학생들은 진지하고 뜨겁게 토론했습니다.


 사실 하세가와 데루의 행위가 더 애국적이라고 평가하는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고 예상을 했었지만, 그렇진 않았습니다. 조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니, ‘외국에 파병된 우리나라 군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하세가와 데루와 오노다 히로의 경우를 단순히 과거의, 일본의 사건이라고 여기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 학생의 토론 활동지. 토론의 과정이 드러나있다.


 생각보다 학생들은 애국의 개념에 대해 메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노다 히로의 행위가 더 애국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당시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 교육방식, 오노다 히로의 군인이라는 직업 등, 생각보다 많은 상황을 고려하여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애국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근거를 제시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도 이 전쟁이 정말 일본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전쟁이라고 믿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하세가와 데루의 행위가 더 애국적이라고 평가하는 학생들은 애국이라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므로,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애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노다 히로의 행위가 더 애국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의 근거를 역으로 이용해, 오노다 히로와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세가와 데루의 행동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우리나라에도 하세가와 데루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오노다 히로는 군국주의에 의한 희생자나 다름없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가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는데 이것이 싫어 숨어서 전쟁이 끝난 것을 부정하고 자기가 끝까지 애국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이런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방송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친 하세가와 데루야말로 정말 나라를 위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로 연결되었습니다.   ‘애국’을 정의해보다


학생들이 토론을 하는 동안 칠판에 적어본 판서. ‘애국’에 대한 나의 생각과 하이타니 겐지로의 말을 적었다.


학생들의 조별토론과 그에 대한 발표 및 피드백이 끝나고, 학생들이 조별토론을 하는 동안 판서를 한 내용과 함께 해당 주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먼저 ‘애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의 답을 구하기 위한 과정들을 설명했습니다. 애국이 나라(국가)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먼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정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여러 정치 권력체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권력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릅니다. 이 답은 현재 우리나라 헌법에서 구해보았습니다. 우리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정리해보면 결국 영화 ‘변호인’에서 등장했던 대사처럼 ‘국가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국은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됩니다. ‘나’라고 하는 개인도 국민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애국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습니다만 굳이 표현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가치로움’을 전달하는 마음이나 행위 정도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애국은 ‘나 스스로가 가치롭게 살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나 스스로에게 무엇이 가치로운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애국은 ‘내가 가치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을 말한 뒤, 학생들에게 ‘가치로운 삶’에 대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상냥하게 살기�라는 책에서 등장한 문구 하나를 소개 했습니다. 그 문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애국심은 가상의 적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 웃는 얼굴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걷다가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려는 마음을 우리는 애국심이라 한다.”


 


 하이타니 겐지로가 말하는 애국은 결국 ‘평화’의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평화는 결코 총구에서 나오지 않으며, 평화는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준비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전쟁과 애국적인 전쟁은 없습니다. 오노다 히로와 같은 ‘애국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우리는 ‘애국’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학생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보다는 누구도 죽기를 강요하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애국’을 기억하길


2016학년도 2학년 2학기 2차 동아시아사 지필평가 19번 문항.


평가도 수업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평가는 수업보다 더 강력한 각인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내신 평가의 결과는 고스란히 입시에 반영됩니다. 특히 수시의 비중이 정시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학생들은 내신 평가에 매우 민감합니다. 때문에 대입을 계획하고 있는 학생들은 상당히 집중을 하여 평가 문항에서 제시된 자료를 읽고 문제를 풀게 됩니다.


 수업과 평가가 연결되면서, 평가를 통해 다시 수업을 상기시키고, 수업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정보까지 전할 수 있는 평가문항, 교사의 가치와 철학이 담겨있는 평가문항을 만들기 위해서 부족하지만 노력해왔습니다.


 왼쪽의 평가 문항은 위의 토론 수업 내용들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토론 수업의 내용을 압축하면서 학생들이 이 문제를 통해 다시 한 번 토론 수업의 내용을 상기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동시에 ‘우치무라 간조’라는 미쳐 활동지에 담지 못했던 인물에 대해서도 이 문제를 통해 소개해주고 싶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크리스쳔이었습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전쟁이 가져오는 피폐함을 외치는 동시에 전쟁을 추진하는 제국주의자들을 향해 ‘신의 불벼락을 맞을 것이다.’라고 경고를 하며 전쟁 자체를 폐지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 인물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정면으로 맞선 일본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동료 교사 간의 교차검토 때 동료 역사 교사가 이 문항을 검토한 뒤 ‘이 문제 답이 뭐에요? 이거 너무 어렵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세가와 데루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 출제 경위와 의도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고, 아마 학생들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일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실제 시험 결과, 가장 정답률이 높은 문제가 바로 이 19번 문항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가장 쉬운 문제였던 것입니다. 어떤 학생은 ‘선생님, 왜 오노다 히로 사진은 안 넣으셨어요? 오노다 히로 사진 있을 줄 알고 찾아보았는데.’라고 저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그래도 기억에 남는 수업이었나 봅니다.


아마 학생들은 단순히 인물의 활동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 문제의 답이 ‘하세가와 데루’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마음 속에도 바람직한, 자신만의 ‘애국’의 상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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