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준 Jun 04. 2020

마실 것의 일상 #2.아이스 아메리카노

후회를 놓지 못하는 너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내고 싶다.

준비물: 에스프레소, 물, 얼음.  


 아이스 아메리카노. 내가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다. 비가 와서, 추워서, 따뜻해서,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특히 점심 후 마시는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는 취향 저격이다.  음식이 미국적이 되면 좀 커지는가? 싶었던 것이 커피와 피자다.  얇은 도우대신 두꺼운 도우를 쓰는 미국식 피자. 에스프레소에 물을 더해 양을 늘리고 커피의 짙음을 희석하는 방식과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커피를 막 좋아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잘 마시지 않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내가 커피 애호가라는 것을 은근히 알리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엔 내 취향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했다.  좀 더 지나고 나니 주로 에스프레소를 고집했던 까닭은 짧고 짙은 에스프레소 고유의 독특함에 내 취향의 독특함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더해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커피와 일상을 보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내리게 되는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얼음을 품은 검은 투명함은 이미 청량감을 담고 있다. 곧 입속으로 들어와 청량함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원두가 가진 개성대로 혀를 자극한다. 그 개성은 잠시 커피를 머금고 목으로 넘기는 동안 맴돌다가 이후에도 잔향을 남긴다. 원두의 개성을 기억하면서 어떤 원두든지 시원함을 선사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야말로 내 일상의 절친이다.


 나는 열이 많아서 시원한 것이 좋다는 말보다 그냥 좋다는 말이 더 편하다. 왠지 내가 좋아하는 이유를 내게서 찾는 것보다 그냥 상대에게서 찾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건 상대방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것보다 상대방을 왜 좋아하는 지 묻는 일이 더 즐거워서다.  아이스 아메리카도 그렇다. 나에게 맞는 커피는 어떤 것인지 따져보고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다. 커피를 가까이 두고 자주 접하다 보니 내가 자주 찾는 것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로 즐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사실은 에스프레소보다 내게 어울린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커피와 자주 만날수록 나는 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남아 있는 것 중 선명한 것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인 셈이다.


 지나고 나서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감사, 기쁨, 추억들. 많은 것들 속에서 추리고 추려져 남은 것들은 시간 속에서 도리어  분명해진다. 해변 어디쯤에서 움켜쥐었던 모래는 곧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린다. 그 후에 남은 조금을 자세히 들여다 보게된다. 시간 후에는 그렇게 남아있는 조금의 무언가만 응시하게 된다.


 남은 것들은 대게 후회인 경우가 많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인 것이 분명한대도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그 서성이는 시간의 길이는 후회의 깊이를 재는 자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나는 그때 왜 다르게 행동하지 못했는가.’ 다른 결과의 가능성이 내 손에 쥐어졌을 거라는 착각이 선명할수록 후회도 선명하다. 쉽게 떨쳐버릴 수 없던 후회는 그냥 벗 삼아 살고 있다. 언젠가는 너도 흐릿해 질 때가 있겠지. 손바닥에 남은 그 선명했던 모래알도 결국엔 털어내고 다시 걸음을 걷듯이.


 어떤 후회가 하나의 더위가 될 때면 답답한 너와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다. 그 청량함을 한 잔 내려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실 것의 일상 #1.에스프레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