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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04. 2020

마실 것의 일상 #1.에스프레소

사랑은 한 인간과 함께 태어나 그 인격과 함께 자란다.

   햇볕이 좋았다. 코로나를 피해 걸음이 짧아진 날 중 유난히 좋았다. 그래서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싶었다. 손으로 돌려야 하는 커피 그라인더를 꺼냈다. 원 샷 8g, 투 샷 18g 거의 모든 순간 투샷을 선택한다. 그라인더의 뚜껑을 열어 8g이 담기는 커피스푼으로 흘리지 않게 조심스레 투입구에 넣는다. 뚜껑을 닫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린다.

 아사삭, 아사삭, 소리는 귀를 찾고 향은 코를 찾아온다. 커피 향이 코 끝에 머물 때쯤에 그라인더의 가루 보관통을 꺼낸다. 마침내 드러난 커피 가루가 향을 터트린다. 그때의 커피 향은 커피를 손수 내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분쇄된 원두를 사지 않고 굳이 직접 원두를 가는 것은 커피의 맛도 맛이지만 이 순간 때문이다. 조금의 번거로움 속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이다.


 예열된 머신의 포타필터를 분리해 바스켓에 커피 가루를 담는다. 커피 가루를 잘 저어 커피 가루가 균일하게 배치되도록 한 다음 탬핑을 한다. 꾸욱. 탬퍼의 압력을 받아 커피 가루는 평평하게 정렬된다. 그룹헤드에 포타필터를 장착시킨 뒤 레버를 올린다. 보일러에서 밸브를 타고 올라온 고온고압의 물이 드디어 그룹헤드에 이른다.


 이윽고 커피 가루와 고온의 물은 만난다. 높은 압력에 등 떠밀린 고온수는 커피를 깊이 머금고 흘러나온다. 35ml정도의 짙은 커피. 바로 에스프레소다. 이 에스프레소가 모든 커피 베리에이션 음료(커피가 첨가되는 다양한 마실 것)의 주역이다. 물에 섞으면 아메리카노, 우유에 섞으면 라떼, 우유와 다양한 시럽에 섞으면 마키아또가 된다.


 나는 왜 이 번거로운 과정을 즐길까. 간단하다.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커피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 애정에 가깝다. 그렇다. 커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장비를 구입하고 직접 내리는 번거로운 과정을 일상에 두는 이유. 커피 생두를 직접 볶기도 하면서 자욱한 연기를 보는 이유 역시 커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부산 남포동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만난 이후,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스타벅스라는 낯선 공간에서 약속이 있었다. 많이 보고 싶은 사람이라 꽤 일찍 약속장소에 갔다. 무언가 주문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제일 싼 것을 찾아보았다. 제일 싼 것은 바로 ‘에스프레소’였다. 당당하게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주세요.” 점원이 대답했다. “양이 아주 적고 많이 쓴데 괜찮으시겠어요?” “얼마 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많이 마셔본 듯 “네,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됐어. 자연스러웠어.’라고 칭찬도 해주며. 그리고 나온 에스프레소는 정말 처음 보는 작은 잔에 브라운 거품이 살짝 올려져 있는 검은 물이었다. ‘이게 이천 원이라고?’ 속으로 놀라며 잔을 들고 올라와 창가 소파에 앉았다. 한 모금 마시니 ‘웩. 이건 한약인데?’ 싶었다. 그 뒤로 나는 커피를 특히 에스프레소를 한동안 한약 맛이라 불렀다.


 이상하게도 이 어설픈 첫 만남은 한약 맛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커피는 내 일상에서 떠나지 않았고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커피를 더 좋아할수록 갖추고 싶은 것도 더 많아졌다. 그것들을 사용할수록 관리에도 신경 써야 했다. 커피가 지금만큼 대중적이지 않았던 때라 인터넷을 뒤지며 공부도 했다. 좋아하기에 번거로움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번거로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의미들을 하나씩 부여하는 것이 커피를 좋아하는 일상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뿐 아니라 그 순간들이 커피를 사랑한 시간들일 것이다.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사랑은 경작되는 것>이라는 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事後)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사랑의 본질이 감정에 있다면 사랑은 찰나의 것이다. 그 찰나의 감정은 잡으려고 할 때 애처로워진다. 감정에 책임과 도리를 묻는 것은 낯설다. 감정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찾아온 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사랑의 본질이 감정이라면 그 어떤 노력보다 약물의 힘을 빌리는 것이 사랑의 극지점에 도달하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서글프게도 세상은 온통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랑하고 있다. 그 어디쯤에서 욕망과 사랑은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본질은 감정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감정보다는 일상에 가깝다. 누군가와의 관계다. 사랑은 삶의 태도라는 모습을 갖추고 인격이라는 얼굴을 갖는다. 사랑은 한 인간과 함께 태어나 그 인격과 함께 자란다. 폭력적 인간의 사랑은 폭력이 되고 책임과 도리를 비처럼 피하는 인간의 사랑이란 한없이 가볍다. 인간의 삶이 아름다워질 때 사랑도 아름다워지고 인간의 인격이 견고해질 때 사랑도 견고해진다. 가슴 벅찬 기쁨과 설렘은 그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이 주는 선물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경작되는 것이라는 정의를 한껏 끌어안는다. 사랑은 땀 흘리며 수고하여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섬세하게 돌보는 일이다.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날씨를 위해 기도하고, 때론 바램과 다른 야속함에 맞서는 일이다. 결과가 노력과 재능에 무관할 수 있고 때론 도리어 찌르는 비수처럼 내 앞에 남는 일. 그러나 여전히 사랑한 나는 그 땅 위에 남아, 서 있는 일이다.


 사람을 사랑해야지만 만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날씨 같은 순간. 예컨대 아무리 소리쳐도 무심히 내리는 비와 같은 순간들. 그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내가 있었다. 그런 나에게 조용히 걸어와 함께 비를 맞은 이를 만난 적이 있다. 왜인지 모르지만, 함께 웃으며 걸었던 것 같다. 무엇을 사랑할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후일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의 삶을 요구할 것이다.


 커피를 오래도록 좋아하게 된 이유는 홀로 일 때 좋은데 둘 이상일 때 더 좋아서다. 홀로인 나에게 건네기 좋고, 조금 지쳐 보이는 눈앞의 사람에게 건네기 좋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한잔을 조용히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도 함께여서 좋은 사람이 있다. 부족하지만 한없이 이어가고 싶은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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