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추운 봄을 건너는 법
[시작하는 글]
천지인.
하늘의 시간이 있고 땅의 시간이 있으며 인간의 시간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보통 시간을 달이나 날짜로 나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지금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기준으로
시간을 나누었다.
절기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의 시간이다.
생각날 때마다,
다음 절기를 앞두고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이 시간을 적어보려 한다.
#1. [입춘]
나의 시작은 늘 입춘으로부터다.
봄을 꿈꾸는 것.
그래. 나는 정말이지
늘 꿈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왔다.
입춘대길.
대문에 대각선으로 붙여놓은 입춘대길 문구가 눈바람에 휘날리더니 결국 물기에 적셔들기 시작한다.
꿈은 늘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시작된다.
추위에 웅크릴수록 상처에 웅크릴수록
꿈은 더 선명해지고 단단해지는 성질을 지닌 것만 같다.
그럴수록 나는 분주해진다.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대길.
큰 미래를 품고 길을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다시는 이 봄의 입구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엔 다른 꿈이, 다른 시간대에서
다른 길로 나아갈 것이므로.
나는 대문 앞에 서서 마지막이 될 나의 이번 겨울을 서둘러 뒤돌아보았다.
추웠고 날카로웠던 겨울.
나를 상처 입힌 수많은 날카로운 조각의 끝이 내가 돌아오길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나는 겨우 아물어 딱지가 생기기 시작한 몸과 마음의 생채기들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또 나를 다치게 할 순 없었다.
이제 정말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직 추운 겨울이지만 견디기 힘들어 새 봄을 꿈꾸었다.
꿈을 꾸었으니 시작돼버린 봄.
나는 어쩔 수 없이 겨울의 묵은내를 다 벗어내고
가벼운 몸으로 문턱을 넘었다.
아직 날 선 차가운 바람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
죽을 수 없어 넘어가는 통과의례.
내 어깨와 등뒤로 쌓인 차가운 눈더미.
그 시간의 무게를 작은 열기로 버티다,
얼어 굳기 전 반드시 깨야만 했던 몸부림.
깨진 얼음들 사이에서
수없이 생채기를 내며 피 흘리다
결국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아버린 꿈.
그 꿈으로 인해 내몰린 경계.
바로 입춘대길의 대문이다.
.
여기가 나의 시작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너이고, 나다.
네가 꾼 꿈으로부터 시작된 자연이며,
여기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제 너와 내가 봄을 깨워 나가는 것이다.
.
쫓기듯 대문을 나선 나는 겉옷 하나 없이 매서운 추위와 바람에 맞서야 했다.
이제 와서? 너무 늦지 않았어?
네가 과연? 이게 맞아? 뜬금없이?
대부분의 꿈들은 이 차가운 바람에 결국 흩어져버리고 만다.
입춘을 지내는 것은 꿈을 잃지 않고 그저 견디는 것이다.
보름의 기간 동안.
환한 보름달이 점점 깎아져 가고
결국 사라져 버린 달빛을 마주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꿈이 살아남았다면.
된 것이다.
#2. [우수]
이제 얼음과 눈은 금방 녹아내릴 것이다.
눈과 얼음에 뒤덮여 허옇고 차갑기만 하던 길은
점차 제 색을 지닌 풀과 나무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게도 색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내려다본다. 아니 뒤돌아보았던가?
이번엔 노란색이다.
작은 노란빛을 확인 한 순간 세찬 바람이 휙 지나가며
내 빛을 흔들어 제꼈다.
나는 구차하게 그것을 지키려 품지도 않은 채
순간 이 것이 온전히 바람에 휩쓸리기를
그래서 영영 날아가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끝나도 좋았다.
더 멀리 가는 상상보다
지금 이만큼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이미 충분했으니까.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저 색 하나 낸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에 내맡긴 색은
오히려 휘날리고 흩날리며 꺾이지 않는다.
갈대 같은 아이가 되었네. 갈대 같은 노란 아이.
그것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서야 했다.
아이가 가리킨 손가락 너머로
개구리가 펄쩍 튀어 올랐다.
얼어붙은 강물은 어느새 모두 녹아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