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모츄 Mar 02. 2024

공짜라면 정중하게라도

부탁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20대 후반의 청년기 때엔 디자이너를 만나면 매우 반가워하면서 뭔가 서슴없이 공짜로 부탁하시는 목사님을 많이 만났습니다특히 "예수믿는 디자이너"는 목사의 부탁이거나 교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무조건 해 줄 줄 아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거기엔 교회의 크고작음도, 교단의 다름도, 심지어 부탁하는 목회자의 나이에도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갓 회심해서 마음이 불처럼 타오르던 때다보니 가리는 것 없이 일을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래서인지 모르지만 일러스트 비용이나 디자인 비용을 주시는 분이 참 드물었어요.


다행히 지금의 나는 그런 타입은 아닙니다. 다 들어보고 정중히 사양하는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안되는 일이라 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고 교회 일이라 하면 무조건 맨 손으로 해주는 것이 당연한 줄 아는게, 그게 은혜받은 사람의 태도라고 당연시 하는게 싫은 까닭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 쪽에서 주는 것이지 받는 입장이 당당히 요구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한 것을 받았는데 무슨 은혜. 그런 '당연시'여김 받는 게 싫어서 나는 좀 까다롭게 구는 편이 되었습니다.


그런 고구마같은 이야기들도 하기는 할 건데, 지금 할 이야기는 정중한 부탁을 받았던, 별로 흔치 않았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아주 오래 전, 건너건너 알기에 면식이 있는 한 목사님이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어렵사리 교회 로고를 부탁하셨습니다. 아마 예전부터 부탁하고 싶으셨던 듯한데 기회를 좀 살피셨던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필요하던 차에 마침 잘 만났네"가 아니라, "필요한 게 있는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눈빛을 내게 보내준다면 나도 엉덩이를 뺄 이유가 없지요(거기에 만약 소정의 사례를 준비하고 있다면 감동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빠듯한 개척교회 운영을 하시던 그 목사님은 디자인 비용을 주실만한 여유는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조용하고 정중한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얼마 후 목사님이 메일로 기존에 쓰시던 교회로고를 보내오셨습니다. 




메일에는 감사하다는 말의 반복 이외에, 로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어요. 나는 파주 안디옥 교회가 어느 교단 소속인지, 이 심볼마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혼자 찾아보고 고민해야 했는데(나와 친한 목사님의 친구인거지 나와 친하신 것이 아니어서) 지구는 지구일테고, 저 A자 비슷한 것은 알파와 오메가의 알파를 그리스식으로 표기한 것이거나 뒤집어 세워놓은 성경일거라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뒤집는 교회는 거의 없으니 알파일거라 생각했고요. 그럼 뜻은 당연히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거나, 말씀이신 하나님일테고. 위의 빨간 것은 십자가겠고. 그러니까, 온 세상을 십자가의 복음과 말씀으로 뒤덮자 뭐 이런 뜻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목사님께 확인 메일을 보냈더니 맞답니다. 그런 뜻이랍니다. 그 취지를 살리셨으면 하는 것 같아서 기도하고 고심하다가 다음과 같이 손을 좀 봐드렸습다. 파란 색을 좋아하시는 것 같았지만 저 원청(원색의 블루)은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살짝 민트로 바꿔서 화사하게 만들고, 형광색 지구와 붉은 십자가는 청녹의 보색이 되는 오렌지 계열로 설정해 색상도 줄이고 주목성도 높여보려고 나름 애썼습니다. 내가 봐도 훨씬 이뻤습니다. 그 목사님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요. 전화를 하셔서 매우 길게 칭찬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목사님이 아직 시무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교회가 아직도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도. 아니, 실은 만들어드린 로고를 어디에 쓰셨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나 거기 가보지도 못했었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