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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Mar 05. 2024

내가 왕이라 한들

시편 45:1~17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시45:1)


좋은 말로 왕을 위해 지었다는 것은 아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졌다는 표현이라 한다(GBS,1992). 서기관의 붓끝 같다는 표현은 자신이 하려는 말이 굉장히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보면 된다. 즉 이 노래(시편)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불려지는 아름다운 천상의 송가라고 말하는 중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왕에 대한 칭송과(시45:1~9) 그와 결혼하게 되는 신부에 대한 축복(45:10~17)으로 이루어진다. 1~9절에 묘사된 왕은 용맹하고 위엄있고 영광스럽고 강력하기까지 하다. 또한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가장 향기롭고 고귀한 상태로 섬김을 받는다. 10~17절은 그와 결혼하게 되는 아가씨에게 '너 잘됐다, 이런 왕이랑 결혼하다니, 복 받은 줄 알아라'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싯구가 예수 그리스도로 종종 해석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하는 신부는 당연히 교회의 몸된 신도들, 구원을 얻게 된 우리들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어느 왕이 이토록 강하고 위대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하나님께서 직접 기름을 부어 왕들 중에서 그를 뛰어나게 높이시겠는가. 그런 완전무결한 왕이 이스라엘 연대에 기록된 바 없다. 한 시절 잘 한 왕은 있어도 이렇게나 잘한 왕, 잘난 왕은 없었다. 다윗도 어림없고, 예수님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시를 읽노라니, 이 시가 왕들에게 한번씩은 들려졌겠지? 싶다. 시 45편의 부제가 [왕의 결혼식 노래]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고라자손이 이 노래를 지은 다음 왕들마다 한번씩은(결혼을 한번은 했을테니) 들어봤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자기가 생각해도 모자란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왕이었다면 이 노래가 울릴 때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겸손해 졌을 것이다. 단지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결혼식 날 이러한 칭송의 노래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한가 싶다. 예수 믿은 게 무슨 벼슬이라고, 남들보다 뭐 좀 깨달은 게 무슨 대수라고(특출나게 깨달은 것도 없지만). 사람들의 칭송과 칭찬, 오직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입김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구원의 섭리에 따라ㅡ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전적인 은혜였을 뿐이다. 살아가며 사색하며 얻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성령께서 이끄시며 가르치신 많은 것들 가운데 내가 소화한 몇 개 안되는 음식에 불과할 뿐이다. 주님의 은혜는 넘치고 넘쳤으나 나는 그것을 다 받아들일 머리도 그릇도 못되었다.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과도한 칭송의 노래를 듣고 있었을 어느 왕처럼,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책임지심 가운데 살면서 그것을 내 잘난 덕인 줄 알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창피하다. 창피해. 혐의를 온전히 벗어나질 못하는 마음과 변명찾을 생각조차 안하는 내 머리를 보니, 역시 그런 착각을 저질렀던 것이 분명하다.


오직 은혜로, 오직 은혜로. 흠없고 온전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이 구원이 다시금 감격스러워진다. 감사해진다. 내 옆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함이 옳다. "너 땡 잡았구나. 좋겠다야! 이런 왕이랑 결혼하다니, 복 받은 줄 알아라!" 10~17절의 말씀은 이제 내 것이 된다. 내가 왕인줄 알았던 교만과 착각이 벗겨지고 나니, 오직 은혜로 구원을 입은 내 자신이 밝히 드러난다. 내가 왕인줄 알았을 때는 불만 투성이였는데, 그분의 은혜가 유일한 원인이 되어 선택받은 신부임을 알게되니 감사할 것이 넘친다.


내가 왕이라 한들, 이보다 감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구원의 기쁨이 신부되는 기쁨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이제야 맛보게 되네. 왕이 좋았는데, 왕이 안되겠다고, 교만의 자리에 서지 않겠다고 몸부림할 때 제법 멋지게 신앙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왕도 아니면서 왕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던 창피한 시간들이었다. 왕도 아닌 애가 왕의 자리를 벗겠다고 괴로워하고 있었으니 하늘의 영들이 봤다면 실소를 금치 못했을 것 같다. 오우 창피해...


오늘은 참.. 기쁘고도 부끄러운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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