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묵상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모츄 Sep 14. 2024

상처가 불러온 근본주의

느헤미야 8~9장

느헤미야서는 구약의 포로기 끝무렵을 기록한 책이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두 나라가 망하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수십년 만에 귀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이 와서 한 것은 두가지, 성전의 재건과 성읍의 재건이다. 삶의 터전과 종교적 터전을 재건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오늘 본문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거주를 시작한 후(느7:1~4) 반년이 지나 7번째 달에 모든 백성이 '물의 문'이라고 일컫는 곳 앞에 있는 광장에 모여 율법책을 낭독하고 듣는 시간을 가진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이들이 남녀를 무론하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라고 기록했다(who were able to understand/느8:2). 이를 가지고 말씀을 깨달을만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식으로 말을 풀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있는 자는 들어라!'는 말씀과 연관짓고 싶지도 않다. 그런 식의 감동은 받고 싶지 않다. 사실 그런 것을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은 이단들이다. 자신들을 특별한 계시 안에 둠으로서 스스로 감격하고 신앙적 안전을 느끼고 우월감마저 느낀다. 물론 은혜와 감사라고 포장은 하겠지만은... 나는 그런 것들을 원천 거부하고 싶다. 물론 그렇게 은혜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신앙적 은혜일거라 생각하고 있다.


신앙적 안전을 느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지금 현재로 불안하고 불편한 상태라는 반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영적 엑스타시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적인 은혜의 체험을 하지 못해 불안한 상태라는 것이거나 아무리 애써도 체험이 안되어 불만이 상태라 여겨진다. 혹은 체험을 했는데 그것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보잘 것이 없어서 당혹스러운 상태일 수도 있겠다. 미국의 석학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unseen reality)와 맺는 관계"라고 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 붙잡힌 상태"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미 체험한 사람은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 대상의 무궁한 미지성(未知性) 때문에, 그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볼 수 있다(일관되고 주된 관심사라는 이야기지 식음을 전폐한다는 식의 표현은 아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들이 느혜미야 앞에서 낭독된 율법을 읽히고, 뜻도 풀어주어 깨닫게 하니 그들이 다 울었다고 한다(느8:9). 여기서 그들의 눈물은 뉘우침으로 인한 슬픔이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느8:9)",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느8:11,12)"


그리고 그들이 그달 말에 모여 한 일이 9장에 나온다.

"...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느9:1~3)"


그리고 철저하게 율법의 말씀 중심이 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단절적인 순수성에 대해 흠이 될 만한 것들이면 철저하게 차단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혼약한 처자들까지도 그들이 이방핏줄이면 현재의 관계를 끊는 데까지도 서슴없다(느13).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또한 그 무렵 나는 유다 사람들이 아스돗, 암몬, 모압 여자들과 결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식들 가운데 절반이 아스돗 말은 해도 유다 말은 할 줄 몰랐습니다. 나는 그들을 꾸짖고 저주를 내렸고 그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때리기도 하고 머리채도 잡아당겼습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하며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내지 말고 그들의 딸도 너희 아들이나 너희에게 시집오게 하지도 말라.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그래서 죄지은 것이 아니냐? 많은 나라들 가운데 그 같은 왕은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하나님께서 그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세우셨지만 이방 여자들 때문에 그마저 죄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해 이 모든 끔찍한 악을 저지르고 우리 하나님께 죄짓고 있다는 말을 우리가 들어야겠느냐?”(느13:23~27/우리말성경)


내 보기에 이쯤되면 느헤미야는 이 부분에 있어 트라우마, 병적인 상태다. 소위 PTSD 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이방인 출신이라 아이들이 유다 말을 못하고 이방언어만 배웠다면, 엄마와 아이에게 귀화한 나라의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제정하면 될 일이다. 물론 솔로몬이 잔머리를 굴려 주변 나라의 모든 공주와 혼약하는 통에 나라가 이방신으로 들끓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솔로몬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방족속으로서 유대민족 안에 귀속귀화된 이들은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출애굽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나중에 이스라엘 공동체로 받아들여진 라합이나, 룻기의 주인공 룻 같은 인물은 태생부터 이방민족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다시피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 있다. 우리 개신교 신앙의 모체가 되는 예수님의 계보에! 특히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모본적 인물 중 하나로 신약성서에 기술된다(히11:31,약2:25).


근본주의(fundamentalism) 신앙의 위험성은 종교의 근간을 지킨다고 하는 처절하고 순결한 당위성이 빛나는 이면에, 이를 위해 자기들이 정해놓은 몇 가지 원칙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려는 지독한 아집에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고결하고 성스럽고 간결하게 신앙을 하는 순수하고 맑은 이들로 보이나, 한편으로는 시대적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어느 시대에나 같은 답만 내놓는 먹통이자, 변화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행보를 신앙의 이름으로 방해하는 불편한 존재들이 된다. 비교적 기독교에 호의적인 종교학자 성해영은 "참된 종교의 판별기준은 이상적인 교리의 선언에 있지 않다. 핵심은 그것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결과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고, 그 이야기는 이 글의 말미에 쓸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의 핵심은 하나님에게로 신자의 궁극적 관심을 돌리게 하려는 데에 있다. 보이지 않는 존재, 형상화조차 금한 보이지 않는 참 실재, 하나님 자신에게 자기 백성들의 궁극적인 관심을 돌리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 중 실정법에 해당할만한 것들은 인간의 건강에 절대적으로 유익하거나 도덕적으로 혹은 법률적으로 완전무결하여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분의 말씀 중 많은 것들이 그 시대에 맞는, 그 시대에 유용한 것들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시대상황에 적절한 형태를 수용하시면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포로로 잡은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으면 종이 아니라 자유인의 신분으로 귀속후 행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 하나만 봐도, 이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는 내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이 이해될 것 같다.


더 살펴보자. 현대사회는 암몬과 바알을 숭배하는 이들만 삭발을 하고 문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문신을 한 목사들도 있다. 그런데 문신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죄악시된다. 그들이 암몬과 바알을 숭배하는 영에 붙들려 있기에 문신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영적으로 구별될 필요성이 있어서 돼지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이지 돼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게 문제라면 한국은 정말 영적으로도 건강면으로도 대단히 문제가 있는 나라다. 삼겹살이 서민경제지표로 활용될만큼 이렇게나 사랑받는 나라이니. 여자는 머리에 무얼 쓰라는 바울의 명을 지키는 개신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이단 한 두곳을 제외하면 개신교 내에는 그런 곳이 없는 것으로 안다. 제 아무리 근본주의자일지라도 시대상황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고 산다. 그 시대에만 유용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 기준이 자기들 멋대로라 문제이지.


우리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태어나서 자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갈릴리는 영적으로 그리 좋은 동네는 아니었다. 이방신들이 흔하고 이방인들도 많은 동네였으며, 혼혈도 많아서 이방지역 취급받던 동네였다. 우리 종교의 주체이신 분께서 이방취급, 하빠리 취급, 변두리 취급받는 동네의 일원으로서 성장기를 보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땅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이방인에 가까웠으며 대화의 수준으로 보아 영적으로도 무지한 상태였다. 삶도 온전커나 평탄치는 못한 것 같다. 다만 갈급할 뿐이었던 그녀에게 예수께서 일부러 찾아가 빛을 건네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또한 죽어가는 이를 들쳐업고 살려내고 회복의 온정을 베푼 자가, 피 묻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율법의 부정규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외면하고 갈 길을 간 다른 이들보다 아니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파하셨다.


성경에서 느헤미야가 잘 했다는 하나님의 소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비는 말로 끝을 맺을 뿐이다.

"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이방의 모든 것으로부터 정결하게 하고 각각의 직무대로 그들에게 책임을 맡겨, 정해진 때에 땔감을 드리는 일과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고 은총을 내리소서."(느13:30,31) 오늘날 수많은 근본주의자들이 이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구국활동을 한다면서, 신앙의 정수를 보존한다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대의 물음과 상황에 관계없는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말들만 되풀이하면서 실제로는 인간의 삶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칙적인 무엇을 지킨다고 항상 기뻐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근본주의적 신앙을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믿는다. 아래의 구절을 보자면 말이다.


“주저하지 말고 크게 외쳐라. 나팔처럼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허물을 밝혀라.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고 내 길 알기를 기뻐하는 듯하니 그들이 마치 올바르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은 민족 같구나. 그들은 무엇이 올바른 가르침인가를 내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우리가 금식을 하는데 왜 주께서는 보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통회하며 괴로워하는데 왜 주께서는 모른 체 하십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라. 금식하는 날에 너희는 너희가 즐겨하는 일을 하고 있고 너희가 부리는 일꾼들을 혹사시키고 있구나.

보라. 너희는 싸우고 다투면서 금식을 하고 못된 주먹질까지 하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너희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면 차라리 오늘 같은 날에는 금식을 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받고 싶은 금식,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란 말이냐? 그저 갈대처럼 고개를 숙이기만 하고 굵은 베옷과 재를 펼쳐 놓는 것뿐이 아니냐? 이것이 너희가 금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이것이 너희가 여호와께서 기꺼이 받으실 만한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냐?"(이사야58:1~5,우리말)


오늘날 우리가 끊어내야 할 영적인 악습이 있다면, 느헤미야처럼 하지 말자. 눈에 보이는 시대적 계율들을 영구히 지키려고 노력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영구히 흐르는 그 중심을 헤아려 이를 지키려고 하자. 내가 아는바, 하나님이 원하신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합일의 문을 여는 방법은 다음과 같으니.


"내가 받고 싶은 금식은 이런 것들이 아니냐?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끌러 주고 멍에의 줄을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모든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가난한 노숙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고 네 혈육을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만 하면 네 빛이 새벽 동녘처럼 터져 나올 것이고 네 상처는 빨리 아물 것이다. 그리고 네 옳음을 밝혀 주실 분이 네 앞에 가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네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그는 ‘내가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너희 가운데서 억누르는 멍에와 손가락질과 못된 말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굶주린 사람에게 열정을 쏟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네 빛이 어둠 가운데 떠올라서 네 어둠이 대낮처럼 밝아질 것이다."(이사야58:6~10,우리말)


그리고 내가 아는 바, 예수께서 원하시고 천명하신 율법은 다음과 같으니 말이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6:5).'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레19:18)'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태22:36~40/우리말)


매거진의 이전글 얄팍한 회개말고 진짜 삶을 통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