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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묵상일기

목적이 그게 아닌데

요한복음 6:1~21

by 디모츄

요한복음 6장은 길다. 3가지 기적이 일어나고(1~21절) 예수와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진다(21~71절). 그 결과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를 떠난다. 첫번째 기적은 병고침이었다. 병자들이 낫는 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나섰다(요6:1-2). 그 사람들이 늦도록 머물며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으셨다. 이때 벌어진 일이 두번째 기적,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다. 물고기 2마리와 빵 다섯덩어리를 가지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먹도록 하자, 이에 광분한 사람들이 예수를 왕 삼으려고 했다. 예수께선 이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먼저 호숫가로 보내 건너편으로 가게 했다. 세번째 기적은 밤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에게 풍랑이 닥쳤을 때였다. 예수는 이들을 위해 물 위를 걸어와 그들의 배에 함께 타시고, 풍랑을 잠잠하게 했다.


세 개의 사건이 공통점을 지닌다. 인간의 질고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병들고, 굶주리고, 위험이 닥칠 때 이를 해결해 주신 예수다. 인간의 입맛에 이보다 더 맞는 신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도 당연하다. 현대 국가의 기본이자 최대의 덕목은 무엇인가. 국민이 평안히 생활하고, 번영을 누리고, 안전한 가운데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예수는 며칠간의 행적만으로도 이 능력이 충분함을 증명해 내었다. 이 기적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를 자기의 왕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장로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했으나 부모님의 이사 등을 이유로 어린시절의 한동안을 오순절 계통 교단에서 자랐다. 여러가지 좋은 점도 있었으나 소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라는, 자체 교리화된 주장과는 잘 맞지 않았다. 이 주장의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뿐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저주까지도 모두 해결하고 청산했기 때문에, 우린 이제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 말미엔 항상 송영으로 아래 성경구절을 찬송으로 불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가난과 질병과 저주에서의 해방!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가 행하신 3가지 기적에 다 드러난 일들 아닌가? 병들고 굶주리고 위험에 처하는 것 말이다. 그것을 해결한 예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의 후반부는 이런 감사와 감격에 초를 치고 찬물을 끼얹는 자가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은 기적의 주체인 예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기까지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인자가 너희에게 이 양식을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6:26-27)


자기가 기적을 베푼 이유는 인간의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단다. '표적(the signs)'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단다.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것을 자기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행한 일이란 말이다. 인간의 현생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지만 예수는 현생의 문제를 가난과 질병과 저주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고 보다 근본적이고 절실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현재적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는 자기의 생명을 통해 그들에게 영생을 줄 계획이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다”(요6:51)


같은 예수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예수이고, 자기 생명을 대속제물로 올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하는 예수도 같은 인물이다. 나는 누구를 따를 것인가.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해결해 주는 예수를 따를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그 사귐을 주려는 예수를 따를 것인가.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해결해 줄 예수는 오늘 본문에 없다. 예수 스스로가 그 일에 자신의 존재가 국한되는 것을 거절하시고 부인하셨다. 그 일에 국한되고 특화된 신들은 따로 있다. 바알과 아세라와 라(rah) 같은 신들이다.


나는 요한복음 15장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 왜냐하면 예수께선 이런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고 자기 명을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더러 오병이어를 하라고 하신 적도 없고, 병을 고치라고 하신 적도 없고, 물 위를 걸으라고 하신 적도 없다. 배고플 때 먹여주신 것이며, 아플 때 돌보아 주신 것이며, 위험에 처했을 때 건져주신 것이다. 주님의 때와 시간에 맞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온 목적 그 자체는 아니다.


예수가 온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삶 그 자체다(요17:3). 그러나 예수의 목적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아니, 말해줘도 모른다. “이 말씀은 참 어렵구나. 과연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6:60) "이 말씀 때문에 예수의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요6:66)


내게서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떨궈주지 않는 예수. 아니, 그것을 목적하지 않고 찾아온 예수는 필요없다. 그것이 요한복음이 서두에 말한 '어둠'에 속한 이들의 모습이라 해석된다. 그거 어디다 써먹겠냐는 것이겠지. 판사가 할 일이 있고 형사가 할 일이 있건만, 자기 삶에 매몰된 이들에게 그런 판단은 쉽지 않다. 어둡고도 어둡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런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가 어리석은 악다구니를 치건 말건 개의치 않고, 빛을 비추러 어둠 가운데 찾아오신다. 요한복음 1장은 어둠 가운데 강림한 빛 되신 존재가 있음을 알리고, 많은 이들이 자기 어둠에 가려 그를 믿지도 환대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만약 그를 받아들이는 이가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 말한다. 바꿔 말하면 어둠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빛으로 옮겨놓을 수 있다면 이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예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낸 성부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나 역시, 빛과 소금,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어야 하겠다.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해결할 능력은 없지만, 선한 사마이라인의 길을 걸으며 사는 것.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 주변이 온통 어둠인 것 같아도 혹은 열매가 없어도, 오늘 예수께서 하셨듯이 영원한 생명을 알리고 건네주시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 어둠이 어둠인 것을 스스로 모른다 할지라도. 그런 모습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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