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공동육아

실은 나 살자고 찾아 나선 길

by 열매

꽉 찬 주말을 보내고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반드시 글을 써내야지 했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곤히 기차에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어쩌다 공동육아' 그 제목을 여러 글의 제목들 틈 사이에 끼워 넣었을까.


나는 걸으며 끊임없이 물었었다.

'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네게 공동육아는 어떤 의미였어?'

'무엇이 너를 그 자리로 이끈 거야?'


며칠 전, 글쓰기 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지나간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까 싶어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홈페이지를 오랜만에 검색해 들어갔다.

그곳에는 공동육아의 교육철학이 한 페이지 가득 적혀 있었다. 글의 소제목을 적고, 내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길 원했는지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을까 싶어 공책 한 바닥을 따라 적어 내려갔다.

나의 언어를 잃어버려 되찾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이 철학이 나를 도와줄까 싶어 나침반처럼 펼쳐두었지만, 오늘 걸으며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언어가 아니라고. 그래서 다시 덮어두고 나는 나의 언어를 찾아 나섰다.

공동육아란 여러 집의 아이들을 함께 기르는 삶의 터전을 우리 손으로 직접 일구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그 길을 찾아 나섰다. 무엇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을까. 끊임없이 되뇌어봤다.


나는 그때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보육 현장에서 7년간 일하며 나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부족함을 채우려 했다. 이왕 하는 것 직장 어린이집을 위탁하는 재단에 소속되어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키워나가기에 탁월한 곳에서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교사교육에 사활을 건 기관이었기에 매년마다 연차별 교육, 기관 내에서는 실무자이자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도록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끊임없이 연구자로서의 자세를 훈련받았다. 탄탄한 이론에 기반한 실제 현장에서 쌓는 실무 경험의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배움의 자리로 교사들을 이끌어 주었다. 그때는 그것들을 충분히 누렸고, 보육 현장의 선두에 서서 질 높은 보육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것의 한계는 모든 것이 교사에게, 기관의 책임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양육자는 돌봄의 주체가 아닌, 가르침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많은 것이 교사의 역량에 달린 것이었다. 보육은 그런 것이었다. 양육자가 기관에 맡기고, 우리는 맡겨진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양육자는 교육의 동반자라는 외침은 있었지만, 실상은 껍데기뿐이었다.


게다가 양육자들이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어서 대부분의 지역사회와 연계된 활동은 직장 주변의 지역에 국한되었고, 아무리 열심을 내어 운영해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아이들의 삶의 터전은 자신이 돌아가는 지역이어서 흩어지면 그만이었다. 삶의 터전과 돌봄 받는 공간의 분절. 나는 계속 고민했다. 교사로서 많은 것을 누리며, 명확한 지침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는 있었지만, 세련된 보육 프로그램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 순 없었다. 아이들 또한 그 교육 철학에 갇혀 다듬어져야 했다. 놀이 중심, 아동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보육 현장의 1%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곳은 보육 현장 중에도 가장 이론을 현실화하기에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지만, 그것을 넘어설 순 없었다. 아동 중심이지만,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아동이 그 삶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삶의 터전이 아이들의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책 속에만 나오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챕터 마지막 어디쯤 사례로 나오긴 했어도, 중요히 다뤄지지는 않았다. 직장 어린이집은 돈이 많았고, 너무 세련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며, 대학원을 진학해 유아교육을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대해 좀 더 깊이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평소 내가 고민했던 지점들, 이론에 가깝게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아이들이 주체로 설 수 있는 곳, 놀이 중심이지만, 어느 지점에 가면 딱 여기까지만. 더 갈 수는 없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더 이상 그간 달려왔던 마지막 도착 지점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책 속에서 매료된 아동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어른은 아동이 자신 본연의 존재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역할이 전부였던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마음 한켠에 넣어두고, 호기심을 갖게 했다.


우연히 대안적 주거 공동체를 내세우는 사회적 협동조합 아파트가 남양주 별내 지역에 생기며, 우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오래도록 그려온 삶이지만 우리가 정말 그곳에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내가 있던 송파 지역에 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먼저 찾아 나섰다.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르니, 이제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검색해 찾으며 우리 지역에 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찾아 나선 것이다. 가장 가깝고, 오래 운영되어 온 곳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어느 정도 두 발로 잘 걷고,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까지는 내가 가정에서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애써 오다 아이가 4살이 되어서야 어린이집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정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아이의 돌봄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나 보낼 순 없었다. 사회에 내딛는 첫 발을 그간 갈고닦아 만든 나의 교육 철학과 맞닿은 곳을 만나고 싶었고, 나는 간절했다.


어린 시절 내가 겪으며 아팠던 부분들, 옷에 흙이 가득 묻어도 혼나지 않고, 해방감을 누리며 놀 수 있는 곳, 안전한 먹거리를 양껏 먹을 수 있는 곳, 아이가 주체가 되어 일과 안에서 자신이 자신의 놀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곳, 삶터와 돌봄이 분절되지 않고, 함께 연결되는 곳, 무엇보다 양육자와 교사가 나란히 걸으며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책임질 수 있는 곳. 이것이 내게 필요했다. 실은 내 아이를 위해 찾아 나선 곳이었지만, 실은 내게 필요한 곳이었다. 내게 필요했던 것을 아이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무슨 유토피아라도 찾아 나서듯, 내가 책으로 배운 공동육아가 어떠한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도 직감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곳은 없다는 것을. 최악의 경우, 공동체가 와해되고, 나는 그곳에 실망하고, 도망쳐 나올 수도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그럼에도 이 사회 속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공동육아를 찾아 나섰다.


어린 시절 결핍이라고 여겼던 순간들이 결국, 지금의 공동체를 찾아 나서게 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함께 놀며, 서로의 아이들을 함께 먹이고, 돌봐주고, 함께 놀아주는 그 따듯함도 쫓고 있었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서로의 부족함을 동네 어른들이 함께 등을 맞대며 채워주었던 그 시절의 공동체 문화가 나는 좋았던 것이었다. 다사다난하면서도, 그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좋았던 것이었다. 나는 그 마을의 따듯함을 아이에게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도시 속에서도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연대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했다. 홀로 우뚝 서는 삶을 말하지만, 경쟁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았으면 했다.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함께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혼자만 잘났다고 냉철하게만 살지 않고, 잘 누릴 줄도 알고, 누린 만큼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나누며 살기를 바랐다.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가며 마주하는 자신의 마음속 편견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을 탐구하고, 배우고, 자신의 삶을 확장해 나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공동육아여야 했다.

나를 위한 일이었고, 그것이 아이를 위한 일이었다.


나의 열망 덕분이었는지, 우리 가족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조합원으로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 반,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긴장되는 마음 반으로 우리는 첫 등원 길을 나섰다. 일주일 동안의 적응 기간에 양육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각자의 별칭을 정하고, 소개하며 아이들의 하루 일과 호흡을 따라갔다.

확실히 달랐다. 어떠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놀이를 선택할 줄 알고, 표현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나들이 시간이 2시간이 조금 안 되었는데, 오전 시간은 거의 나들이를 다녀오면 점심시간이 될 만큼 충분히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딸은 자연스럽게 놀이에 참여했고, 저마다의 놀이를 하다가도 함께 놀이하는 문화가 녹아져 있었다. 땅은 모래 위 나뭇가지로 그림도 그리고, 맨손으로 만지며 맘껏 놀이했다. 자신들의 본능을 따라 놀이를 펼쳐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래 내가 그렸던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지. 하며 감동이 일었다.


며칠간의 적응 기간을 보낸 뒤, 혼자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길, 아이는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나는 안심했다.

그러기를 얼마 안 되어 아이가 마당 앞에서 걷다가 턱에 걸려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입술이 쓸렸다. 하원 후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얼굴을 봤는데 입술이 퉁퉁 부어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나는 그간 들었던 감동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인생에 어디 벅찬 감동만 있겠느냐 하며 보란 듯이 바로 좌절의 순간을 마주했다.

아이가 아파서 반찬을 입에 넣을 때마다 자지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속상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아이가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교사의 태도에 서운함이 일었다. 무엇이 그토록 서운했을까. 아이의 상태를 전달하는 모습이 내 기준에서는 다소 투박하다고 느꼈다. 이전에 일했을 때의 온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이전의 어린이집에서는 양육자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미리 전화하여 속상한 마음을 공감하고, 양육자에게 때로는 관리 부실로 사과해야 했던 온도에 비하니,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교사는 원래 다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나만의 해석에 잠겨 있었다. 이 정도 다친 것은 다친 축에도 끼지 않는 것인가? 하면서 내가 느끼는 속상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아이의 상처는 보듬어지기 어려운 것인가 비교하며 늦은 밤까지 괴로웠다.


다음 날 나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린이집에 등원해야 하는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서운했던 것일까. 아이의 다친 얼굴에 같이 속상해하는 교사의 태도를 기대했었나 보다. 어쩌면 제가 좀 더 잘 봤어야 했는데, 죄송하다는 사과라도 받고 싶었던 것일까.

나의 상상과 해석이 덧칠해질수록 나는 괴로웠다. 그래도 적응 과정이니, 마음을 다잡고 터전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멀리서 딸의 반 선생님이 달려오며, "사랑아, 괜찮아? 내가 많이 걱정돼서 잠을 잘 못 잤어." 하며 사랑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밤새 괴로워했던 나 자신을 마주했다. 그리고 난 뒤 괴로움이 무색하게도 아이를 걱정하는 교사의 모습에서 비로소 안심이 되고, 무겁던 마음이 내려놓아졌다.

나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교사는 내가 아닌 아이를 보고 달려왔다. 그렇지..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나는 아이의 첫 적응 과정에서 입술이 터졌던 이 사건을 통해 여전히 보육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사의 정체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토록 서비스를 넘어선 한 아이의 인생의 한 켠을 함께 돕는 일임에도, 그간 훈련받았던 것이 내재화되어 아이가 다치면 서비스 제공자로서 사과부터 해야 했던 나날들이 스치며, 여전히 내가 양육자의 입장이 되니, 내가 했던 대로 서비스를 제공받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그토록 아이 삶의 동반자를 꿈꾸며 달려왔건만, 내 안의 한계를 발견했다. 주어진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안주하지 않으려, 새롭게 보려 애쓰고, 공부하고, 노력했지만, 그 구조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제야 아이가 다친 일이 오히려 내게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놀다 보면 당연히 다칠 수 있고, 그것이 양육자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며, 아이의 안녕을 먼저 바라는 것, 양육자를 의식하는 것이 아닌 아이를 먼저 바라보는 것. 내가 꿈꾸며, 도달하고 싶은 선이 비로소 이 지점이었다는 것을 그 사건을 통해 배웠다.

그렇지. 당연히 이 정도는 다칠 수 있지. 아이가 나오다 넘어질 수도 있지. 그리고 아이가 다친 것의 책임은 교사가 아닌 양육자에게 있었다. 그 의미는 함께 아이들을 터전에서 키우는 다른 엄마, 아빠들을 통해 배웠다. 어느 운영진에 속하는 아빠가 다른 아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앞을 덜 튀어나오게 시멘트 칠을 했어야 한다니까." 하며 자신의 일로 여겼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함께 책임지는 일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교사는 아이의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지, 우리 아이를 돌보는 대상이나 배경이 아님을 절실히 배웠다. 그 계기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책임과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학부모가 아닌, 교사, 양육자 구분 없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함께 땀 흘리며 일구는 한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공간이 바로 터전, 이 어린이집이라는 것을 그 계기로 배웠다.


어쩌다 공동육아로 오게 되었지만, 그토록 바라왔던 곳을 찾아 나서다 보니 내가 그려왔던 그림을 어느새 선물로 받았다. 더 이상 우리는 내 아이를 맡기는 수동적 존재가 아닌, 돌봄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는 주체적 존재라는 것을 공동육아를 하며 체화해 갔다. 그간 돌봄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보육 현장에서 쌓인 독소들을 아이도, 어른도 주체적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임을 내재화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독소를 빼는 과정은 지난한 시간들이 필요했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그렸던 이상적인 곳, 누가 차려준 밥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내 밥상을 내가 직접 차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공동육아에서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