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여기까지 왔는데 안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미안해요. 내가 좀 사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사업한다고 여기저기 돈 빌려 공장 하나 차렸는데, 아는 사람 보증을 잘 못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 다 잃고 빚쟁이가 되어 떠돌아다녔어요. 그게, 머루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하면서 돌아다니던 네 살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해가며 생활비를 마련해 살았는데, 어느 날 공황장애 비슷한 것이 찾아오더라고요. 아마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잦은 스트레스에 쫓기다 보니 그런 증세가 나타난 것 같아요. 그러다 결국 머리에 있는 혈관이 막혀 죽다 살아난 거 같아요. 그 이후로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작은 사찰에 가 수행을 하다가 결국 이렇게 스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길은 그때 당시 살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었던 거 같아요. 그 이후로 집사람이랑 머루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머루 눈 저렇게 된 것도 알고 보면 다 나 때문인 거 같아요. 내가 좀 더 반듯한 사람이었다면 머루 엄마가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요. 머루한테 지금 내 모습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아버지라는 존재가 이 땅 어딘가에 있다는 정도만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네, 스님. 머루도 아마 스님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지금은 너무나 본인도 당황스럽고 해서 그러한 말이 나온 거 같아요."
"모쪼록 선생님 덕분에 머루도 만나고 너무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 이곳에 와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어요. 아마도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이러한 만남을 이루게 해 준거 같아요. 스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이제 머루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자주 만나며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선생님, 고마워요."
문밖으로 나오자 루머는 마루에 앉아있고 머루와 그녀는 마당을 돌고 있다. 그녀는 머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한 손으론 머루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경내의 밤이 깊어간다. 어둠 속에 묻힌 바람소리가 잔잔하게 마음을 달랜다.
"샘님, 여기까지 이렇게 애들이랑 같이 동행에 고마워요. 샘님 덕분에 우리 머루가 아버지를 보게 되었네요. 예전에 몇 번 머루 데리고 이곳에 오려고 했었는데 막상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오늘은 머루랑 저는 같이 자도록 할게요. 루머와 샘님도 피곤하니 얼른 쉬세요."
"네, 어머님, 어머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머루, 루머도 잘 자고."
피곤한 몸을 대충 씻고 침대에 눕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머루는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까? 아직은 청소년기이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스님으로서의 아버지 모습에 대해 많이 당황스러워했을 것이다. 옆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머는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아버지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다. 그는 정말 루머의 존재를 잊고 싶은 것일까? 분명 집을 나갔고 담임으로서 루머의 행방에 대해 전화를 했었는데, 아직도 전화 한 통이 없다.
밤이 깊어간다. 뒤척이는 이불 사이로 부스스 혼란한 마음만 깊어갈 뿐 잠시 쉽게 오지 않는다. 텔레비전도 없고 핸드폰을 꺼내어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라는 노래를 켜 본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벌써 시간은 새벽 세 시를 향하고 있다. 계속 뒤척임만 있을 뿐 눈이 감기지 않는다. 책상 위에 앉아서 꽂아있는 책들을 읽어본다. 대부분 스님들이 집필하신 책이다. 그중 가장 편안하게 다가오는 '마음 수첩'이라는 책을 펼쳐본다. 템플스테이를 오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서 만든 책이다.
'스님들은 너무 외롭고 심심하겠다. 이곳엔 텔레비전도 없고 게임도 없고 오직 나무와 밤하늘의 별만 있다. 스님들은 매일 별만 보고 사는 걸까? 엄마, 아빠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음 여행을 통해 매우 좋은 시간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마음을 어떻게 여행하는지도.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다. 심심하다.' - 초등학교 5학년 OOO
'깨달음은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된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새겨 본 귀중한 시간 속에서 마음껏 내면의 풍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지. 그래도 이곳에 머무는 기간 동안 잠시 바깥 풍경의 복잡함을 잊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전한다.'
- 부산에 사는 OOO
'헤어짐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이곳을 찾았다. 떠나간 그 사람이 아직도 많이 보고 싶고 그립지만 이별의 아픔이란 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그의 존재를 지워보고자 한다. 부디 그 과정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도 하늘 어딘가에서 이곳의 좋은 풍경만을 가슴에 담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 서울에 사는 OOO
'몇 년째 취업 준비를 하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 사표를 쓰고 마음이 답답해 이곳을 찾아왔다.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또 어떤 직업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한동안은 마음이 가자는 대로 그렇게 가보고 싶다. 애써 아픈 마음을 다른 그 무엇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강제적으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다. 바람이 부는 대로 그렇게 한 동안은 살아가 보고 싶다. 백수청년처럼.
- 전주에 사는 OOO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을 깨우는 범종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예불 시간이다. 고요한 어둠 속으로 범종 소리가 잠든 가야산을 깨운다. 그 소리가 묵묵하고 은은하여 마치 노승의 어루만짐처럼 들려온다. 잠시 범종소리에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이곳을 거쳐 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사연 속에서 뜻 모를 공감과 상처의 어루만짐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