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식 밖의 나, 죽음과 사상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결국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아무리 펼쳐 봐도 그 끝에서 마주하는 질문은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반복되는 질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내 정신의 명령을 받아 적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프로이드의 말처럼 저 심연의 끝자리에 잠겨있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의 종자가 있어서 윤회를 거듭하면서 내면에 담겨져 있는 자아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가장 쉽게 독선에 빠지는 오류 중의 하나가 스스로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통제할 수 있다는 커다란 착각이다. 그 누구도 결코 스스로의 마음을 분명하게 진단하고 그에 알맞은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이성의 명령을 받아 순응할 수 있는 영역과 이성의 명령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늘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기에 이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는 자신의 통제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통제 밖에서 스스로도 모른 채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석가모니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설법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에는 고정된 것이 없다고 봤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의 사슬 속에서 돌고 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것은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을 수 없고 놔준다고 해도 놔줄 수가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마음은 우리의 자아의식의 영역 밖에서 더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데 정말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알 수는 있을까? 타인으로부터 억압받거나 흔들리지 않는 참된 나를 찾아서 그 모습대로살아간다는 것이가능할까?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양면성처럼 선과 악이 교차하는 인간의 두 얼굴 속에 무엇이 스스로의 참된 모습인지를 파악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맹자의 성선설처럼인, 의, 예, 지의 덕목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순수한 본성이고 이러한 본성만 잘 발현하면 우린 누구나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목격되는이중성을 띈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단순하게 욕구, 욕망을 닦는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만 할까? 만약 그렇다면 결국 선의 본성, 선의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서질 수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닐까?이런 신기루 같은 존재를 두고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단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은단순한 소망이 아닐까?
우린 살아가면살아갈수록 사람들의 선한 본성을 잘 믿지 않게 된다. 혹시, 선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혹시?’ 다른 의도가 없었는지를 먼저 묻게 되고 그가 행한 선행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의심에 대해 당신의 도덕성이 문제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판에 앞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 또한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그런 것이지, 그 자체를 순수한 모습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면 순자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선한 도덕성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기적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악한 존재일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돋아나는 사랑의 마음, 눈물, 공감의 어루만짐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석을 내려야만 할까? 우리가 하는 행동은 늘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선한 행동도 있다. 즉, 슬픈 자를 봤을 때 흐르는 눈물의 의미는 순자의 본성론에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규정하고자 하면 규정할수록 더욱더 멀어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 착한 아빠이고 예의바른 아저씨이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선생님이며 남을 잘 배려해 주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어느 순간 나쁜 아빠, 예의 없는 아저씨, 남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선생님, 자기만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면 그때 나는 또 누구인가?
이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불교에서는 팔정도의 수행법을 제시한다. 늘 바른 것을 보고(정견), 늘 바른 생각을 하며(정사), 늘 바른 말을 하고(정어), 늘 바른 행위를 하며(정업), 늘 바른 직업을 갖고(정명),늘 바르게 수행하고(정정진), 늘 바르게 기억하고(정념), 늘 바르게 참선해야(정정)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수행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일치하여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적 자유로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갈등과 혼란은 도미노처럼 마음의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쉼 없이 뒤집고 다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죽음의 문턱으로 달려가 보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통해 실존의 의미를 자각할 수 있다고 봤다.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의 공포와 두려움을 지금 내 앞으로 데려와 지금 이 순간이 전하는 순수한 의미 앞에 질문을 던져보면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자각할 수 있다고 봤다.
당장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단 하루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가정이지만 그 가정을 되도록 철저하게 현실의 문 앞에 내던져 보면, 미친 듯이 도망가는 시침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60초라는 그 지겹던 시간이 마치 하루하루의 귀한 보석이 되어 심장을 뛰게 만든다. 죽음 앞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직면한 순간들을 더없이 소중하게 만드는 최고의 선물이자, 최악의 고통이다. 따라서 우린 죽음이라는 최악의 고통을 최고의 선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매순간 죽음을 곁에 두고 죽음이 전하는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처럼 어제 죽은 이에게 오늘 하루는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하루이다. 지금 당신과 나는 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삶을 늘 이렇게 긴박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생의 대부분은 아마도 유의미한 의미로 가득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곁에 있지 않은 죽음을 곁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은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이에 맞는 환경이 당신 앞에 주어져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가정이 삶의 곁에서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가 있을까? 실존주의 철학은 주체성이라는 추상적 언어로 그 해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너무 추상적이다. 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그저 매순간 선택과 판단, 책임의 의미를 짊어지고 삶의 긴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삶의 당위적 의무밖에 제시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이라는 책을 통해 이 세상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창조주가 없는 가운데 세상의 진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윤리처럼 전지(全知)하고 전능(全能)하며 전선(全善)한 인격신이 있다면 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인격신이 없기에 세상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유학에서는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했고 불교에서는 연기설과 윤회, 불성 등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도가에서는 ‘도’라는 우주의 궁극적 원리, 이치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노자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은 도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봤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적인 원리를 거스르는 인위적인 규범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본성은 혼탁해져 가고 사회는 혼란해져 간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최상의 삶은 무위자연의 원리에 따르는 삶이라고 봤다. 즉,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가사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나라는 존재는 자연의 섭리, 이치에 따라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 미와 추에 대한 규정,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 등 인위적인 가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가자는 대로 순수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때 가장 나다운 삶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가사상에 대해 처음 공부할 때 느끼는 감정은 도가사상은 정말 허무맹랑한 사상 같다는 점이다. 특히 장자의 글을 읽다 보면 이건 도통 만화나 엽기소설 같다는 생각이 듣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더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 조각에 있다.”
“왜 점점 더 심해지는가?”
“똥오줌에 있다.” 《장자》 <지북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처럼 허무맹랑한 글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깊은 진리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유학에서 강조하는 인의의 규범과 예절을 바탕으로 한 형식적 규범의 틀이 사회의 안전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이러한 규범이 어쩌면 사회에 더욱더 큰 벽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인간의 구분은 누구의 무슨 기준을 토대로 형성되는 것일까? 아름답다와 못생겼다는 기준은 정말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러한 모든 구분이 차별을 바탕으로 한 선입견은 아닐까? 이렇듯 인위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규범에 물든 현대 사회의 우리들에게 도가사상은 많은 의미를 전해 준다. 특히 타인의 자아, 가치관 등에 삶을 저당 잡힌 채 나다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가사상은 뜨거운 경종을 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상을 접하면
접할수록
생각만 많아진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답은 멀어지고
고민만 깊어져
책을 덮고
길을 나선다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 흙도 밟아보고
긴 호흡으로
당신의 숨결을
마음속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