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벗
몸종 돌쇠와 함께 낚시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마을 입구를 지나 두섬이 영감 집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왁작거렸다. 올 가을 세금을 못 냈다고 관아에서 곤장을 맞아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는 그 집이었다.
혹시 초상이 난 게 아닌가 싶어 돌쇠를 시켜 알아본 바, 옆 동네 사람들이 문병을 왔다는 것이다. 남들 지게로 한 섬 질 때 두 섬씩 져 나를 만큼 힘이 좋아서 동네 일은 물론이고 옆동네 일까지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멀리 옆마을까지 인심을 얻었던 것이다.
추사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이 가난한 농부도 어려울 때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는데 나는 어찌 이렇게 살았단 말인가.
동문수학한 친구와 내 밑에서 학문을 배웠던 제자들만 어림잡아도 수천인데 지금은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권력의 끈이 떨어지니 자연스레 나타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제자 이상적만은 달랐다. 한해가 멀다하고 유배지인 바다 건너 제주까지 진귀한 서적을 보내왔다. 청의 연경까지 가서 구한 진귀한 서적을 자신의 출세에 이용하지 않고, 혹 알려지면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늙고 초췌한 스승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불세출의 대학자 추사 선생처럼 쉼없이 학문을 하였어도 알 수 없었고, 높은 관직에 올라 수많은 사람들을 겪었어도 알 수가 없었다. 비로서 힘 없고 초췌해진 나약한 한 인간으로 돌아와서야 누가 벗인지 알 수가 있었다.
추사는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 '세한도'에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중략)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고 했는데 내가 그에 해당되니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그렇게 세한도는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