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들은 앨범에 잘 간직해둔 소중한 사진 같아서, 그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던, 두 번째 만남이었다. 몸도 마음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날은 말에 절제가 잘 안 되곤 했는데 그날, 어떤 제안을 에둘러 거절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빛과 무언가 말하려 했다가 다시 다무는 입술을 보며 깊은 후회를 할 무렵, 그가 말했다. "전, 사실 주원 씨가 겪으신 일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정말 힘드실 것 같아요."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고 우리는 한동안 잠잠히 있었다.
몸 상태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일일이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꺼내면, 질문을 받고, 또 그에 대한 대답을 하다 보면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아 머쓱하기도 하고 오랜 세월 반복되는 이런 대화 패턴들에 쉬이 지치기도 한다. 초음파나 엑스레이처럼 내 마음을 남들에게도 그대로 들여다보게 해 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일들은 이해하기 어럽다. 나 역시도 타인의 아픔을 듣고 나서, 이해하는 것처럼 위로를 전해놓고도 시간이 지나 직접 그 일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 이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에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밀려온 적이 많다. 분명 그 순간은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겪어봐야 진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도 내 기준에서의 이해라 순도 100프로의 이해는 아니겠지만.
마음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말 중 하나가 "이해가 안가"라는 말이다.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닌데, 그런 대답이 돌아올 때는 짜증을 넘어서 날카로운 분노가 치솟기도 한다. 난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야,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들어주면 안 돼? 물론 사람들에게는 타인이 이해가 안 되는 순간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이겠지만, 왜 그걸 굳이 바로 표현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지 모르겠다.
각자의 태어난 모습과 경험한 사건들, 살아온 환경이 다를뿐더러 불완전한 언어로 마음이 온전히 전달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그런 한계가 있는데,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오해'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언어를 고르고 또 부언할 뿐이다.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일련의 노력들은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이해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신이 겪은 일을 잘 몰라요. 그래도 당신이 힘들어한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잘 모르지만, 부정어임에도 이런 겸허한 표현들이 주는 위로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나는 그날의 대화에서 배웠다. 어줍지 않은 이해나 위로보다는, 잘 모르겠어도 네가 힘들구나, 하는 인지와 인정이 얼마나 큰 힘이 됐던지. "너 힘들구나", 수많은 위로의 언사 중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필요로 하는 말은 이뿐이어도 족하지 않을까.
그때 내가 고마움을 표현했는지, 그 뒤로 어떤 대화들이 오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을 향한 고마움은 십여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연히 그의 이름을 보고 들을 때마다 그런 괜찮은 성정을 지닌 사람은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의 마음을 데워주고 있을 거란 생각에 미소가 머문다.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 고이 접어 간직할 수 있는 말들. 그 소중한 말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잘 모아두어 잠이 오지 않는 밤 넘겨볼 수 있는 앨범이 두툼해지기를, 나의 말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남아주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