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의 밤을 걷다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는 공간, 대호수변공원에서 만나는 봄의 산책

도시는 낮에 가장 분주하고 빠르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시간을 계산하며 하루를 채워 나간다. 그렇게 지나간 하루는 종종 자신의 속도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해가 저물 무렵에 걷는 산책은 조금 특별하다. 낮 동안 흩어졌던 생각들이 다시 모이고,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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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차가운 밤기운이 있지만 나주에 있는 대호수변공원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공원 입구에는 ‘대호수변공원 안내도’가 서 있다. 낮에는 그저 공원의 구조를 알려주는 표지판이지만, 해 질 무렵의 분위기 속에서는 마치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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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어린이 놀이터와 넓은 잔디 공간이 나타난다. 낮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공간이지만 저녁이 되면 그 풍경은 조금 달라진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들고, 대신 공원의 공기가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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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수변공원의 중심에는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다. 곡선으로 이어진 데크길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직선으로 뻗은 길이 아니라 물의 흐름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있기 때문에 걷는 동안 자연스럽게 속도가 늦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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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산책이라는 것은 목적지보다 걷는 리듬이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시간, 하늘은 천천히 푸른빛으로 바뀐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그 빛이 호수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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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비친 불빛은 고요하게 흔들리면서 마치 시간도 함께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호수 주변의 나무들은 아직 봄을 완전히 맞이하지 않은 모습이다. 가지에는 잎이 많지 않지만 그 덕분에 하늘이 더 넓게 보인다. 겨울과 봄 사이 어딘가에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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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계절의 경계에 서 있는 공원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정자가 보인다. 그곳에 잠시 앉아 있으면 바람이 호수 위를 지나와 얼굴을 스친다. 도시의 소음 대신 들리는 것은 물결이 부딪히는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발걸음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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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걷고 있다. 누군가는 빠르게 지나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루의 운동량을 채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호수 주변을 몇 바퀴 돌다 보면 이상하게도 걸음의 속도가 일정해진다. 숨을 쉬는 속도와 발걸음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맞춰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순간이 우리가 산책을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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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수변공원은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거대한 건물도, 사람들로 가득한 명소도 없다. 대신 이곳에는 걷기 좋은 길과 조용한 호수, 그리고 시간이 있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종종 자신의 리듬을 잃어버린다. 일은 많아지고, 해야 할 일들은 쌓이고, 하루는 빠르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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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 이렇게 잠시 걸을 수 있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공원의 불빛이 더 또렷해졌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물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고, 가로등의 빛은 호수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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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이곳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한번 천천히 걷게 된다. 아마도 나주의 대호수변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속도를 다시 찾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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