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우복 종택(尙州 愚伏 宗宅)
국가 민속문화재(國家民俗文化財)는 대한민국에서 의식주, 사회생활, 민속, 신앙 등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것 가운데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지정을 한다. 고택 등도 중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민속문화재로 지정을 하는데 상주 우복 종택이 제296호로 지정이 되었다.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생전 조성한 초기 건축물들과 사후 조성된 종택이 조화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는 건축물이다.
상주시내로 가는 길목에 우복 종택의 이정표를 보고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종택은 우복산과 이 앞을 흐르는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자리하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튼 口자형으로 배치된, 종택으로써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남 지방의 반가라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어서 방문한 날도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보았지만 마치 여러 번 본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 고택은 진주 정 씨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38세 때 이 고장에 들어와 남은 여생을 지낸 곳으로, 우복 동천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대문이 열려 있고 그 후손과도 인사를 나누었기에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우복 종택은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는데 기단이 2단으로 만들어져 있고 뒤쪽은 낮추었다. 우복 정경세는 진주정씨로 진주정씨는 상계가 연결되지 않는 8파가 각각의 중시조를 시조로 삼고 고려시대부터 진주에 산거하고 있다. 이를 크게 분류하면 정예(鄭藝)·정자우(鄭子友)·정장(鄭莊)·鄭櫶(정헌)을 시조로 하는 4파로 나누고 있다.
마당이 있는 집을 꿈꾸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다. 마당이 있는 집은 무언가 낭만이 있어 보인다. 대신에 손이 상당히 많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은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을 소장하고 있고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시대 제례문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상주라는 중심도시에 규모가 큰 도남서원은 바로 이곳에 정착한 정경세가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도학(道學)이 정몽주(鄭夢周)에서 시작되어 이황(李滉)에게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正學)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정경세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경상감사로 나가게 된다.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했다고 한다.
사람은 도리에 밝아야 한다고 한다. 우복 종택은 조금 특이한 건물의 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이 많지는 않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성실함이 배어 있는 느낌이다.
이곳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살고 있는 안채다. 안채는 바깥 공간과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차단된 것이 특징인데 이곳의 구조도 비슷하다. 우복(禹伏) 정경세(1563~1633) 선생은 1602년 대산루를 짓고 1603년 별서 기능을 가진 계정을 지었으며 그의 고손자인 주원(1563~1633)은 영조가 하사한 사패지에 종택을 지었는데 정경세가 내려오기 바로 직전인 1600년에 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고 나서 같은 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곳에 내려왔지만 다시 올라오라는 소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왜 우복이라고 호를 지었을까. 愚伏의 우(愚)는 어리석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겸칭이다. 게다가 복(伏)은 엎드리다는 의미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우복 정경세는 그것을 삶의 신조로 살지 않았을까. 伏은 근본적으로 충성(忠誠)을 의미한다. 복날은 가을 기운이 여름 기운에 눌려 엎드린 날이기도 하다. 우복 종택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자신을 낮출 때는 낮추고 때론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