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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9. 2019

옳고 그름의 저울

권시를 모셨다는 서구의 도산서원

정치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의 속한 그룹의 그릇되었다고 판단되는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놓고 같이 움직이는 사람이나 침묵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공식적으로 반대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특히 당파의 이해관계가 첨예했던 조선 후기에는 더 쉽지가 않았다.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저울은 반드시 있을 테지만 이해관계나 이득에 따라 저울의 무게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것이 사람의 간사함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이라고 하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도산 안창호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서구 롯데백화점에서 건너 안쪽으로 들어오면 자리한 도산서원은 마을 뒷산을 도산이라고 했던 그 이름을 따서 붙여진 서원이다. 도를 이루는 산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옳고 그름의 저울을 어떻게 했을지를 소신 있게 추진했던 권시의 생전모습이 연상이 된다. 

1693년(숙종 19)에 세워진 도산서원에는 강당으로 사용하였던 명교당과 유생들의 숙소진 지선재, 시습재, 권득기, 권시 두 분을 모시는 함덕사가 있는데 이는 1968년, 1973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퇴계 이 황(1501~1570년)은 ‘공경할 경(敬)’자를 그 어떤 것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가슴속에 새기면서 ‘인생의 준칙(準則)’으로 삼았었다. 

임금이 될 세자의 사부가 되는 명예를 거절하였으나  효종 즉위 후 특별 지시와 사돈이었던 송시열(宋時烈) 등 문인, 학자들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기반을 뒤흔들 예송논쟁 때 반대파인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이 1659년 죽고 말았는데, 이때 인조의 왕비이자,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된 것이 예송논쟁이다. 


 이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니 3년이 아니라 1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남인들은 둘째 아들이더라도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첫째 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뒤에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지만 그는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도산서원이 자리한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오면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에 도산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송촌동에 자리한 동춘당공원의 주인공 송준길이 1668년 임금에게 “시는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버릴 수 없다.”고 주청 하여 한성부좌윤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당시 지명 공주(대전)에 돌아가서 삶을 보낸다.  마음속의 옳고 그름의 저울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의 정신이 도산서원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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