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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밀도

교육은 행복이라는 길의 첫 관문이다.

교육은 100년을 넘어 국가의 근간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주제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온 필자도 교육이 한 사람의 많은 것을 한정짓기도 하고 결정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살고 있다. 글을 쓰면서 한국전쟁,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고려, 신라까지 올라가면서 다양한 교육에 대한 이야기와 그 공간에 대해 언급해 왔다. 사람은 살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은 항상 있어왔다. 그 시대에 필요한 기술이 있었고 어떤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없어지기도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감성을 부여한 예술과 같은 결과물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한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느냐 혹은 취미,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교육의 무게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가 있다.


행복의 밀도에서 가장 먼저 꺼낸 주제가 바로 교육이다. 특히 한국에서 한 번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평생을 얽매여 살아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 교육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법칙이 된 것도 사실이다. 교육은 한 사람이 인생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집값과 소득의 불균형까지 영향을 안 미치는 분야가 없다. 왜 행복의 빈도를 생각할 때 교육을 먼저 생각해야 할까. 과연 지금의 학교는 정말 미래를 위해 12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야 할 정도로 효율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진 곳일까. 선생도 학생도 만족하지 못한 현재의 공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개인적으로 전국에 자리한 수많은 학교들을 직접 방문해보았다. 모든 학교의 건물은 대부분 대동소이하며 그 구조도 상당히 비슷하다. 한국전쟁 이후에 찾아온 산업화시대에 인력을 효율적이면서 빠르게 길러내기 위해서는 획일화와 표준화가 필요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학교가 탄생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산업화시대에 적합했던 공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갇힌 공간에서 살아가는 곳은 딱 세 곳이다. 학교, 군대, 감옥이다. 물론 학교는 저녁에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다시 나온다는 점에서 군대나 감옥과는 다르다.


학교의 환경은 사회를 반영한다고 했다. 학교폭력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경쟁적이고 성공중심적인 사람을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집단지성이 더 이상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해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학생의 부모와 그 사람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보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교육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군대를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성인남자로 적어도 범죄자는 구분되지 않은 사람이다. 범죄를 일으키기에는 젊은 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범죄를 지저를 의지를 가지고 입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 남자들이 군대를 가게 되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군대에서 경험하게 된다.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개개인의 개성은 매몰되어 간다. 그 공간에서는 시간에 따른 계급이라는 것이 있어서 권력의 구도를 만들어낸다. 권력의 관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잘못되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그 관계 속에서 의도하지 않는 폭력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 계속 이슈화되고 있는 학교폭력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학교폭력이 생기고 나서야 사람들은 가해자를 비난한다. 물론 피해를 입힌 가해자는 분명히 적합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학교폭력이 계속 발생하는 이유에는 한국의 학교구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권력구조를 만들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권력구조가 만들어내며 위계관계를 만들어낸다. 전국에 있는 학교를 가보면 상시적으로 운동장이 사용되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럼 운동장은 왜 필요한 것일까. 학생들의 정신이 건강해지기 위해 육체도 건강해질 필요성이 있다. 그런 의도로 만든 운동장에서 학생들의 밀도는 더없이 낮고 실내에서는 학생들의 수가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높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있는 공간에 자신도 모르게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대다수는 한국의 공공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게 된다.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어릴 때 학교 다닐 때의 밀도를 기억할 것이다.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학생들이 콩나물시루처럼 교실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12년을 보냈다. 대학이나 유치원을 제외하더라도 12년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은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IMF가 있었던 1997년 전까지는 그런 교육환경이 어느 정도 유효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험은 공정해 보이지만 공평하지는 않다. 부모가 가진 돈에 의해서 주어지는 기회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이 압축성장을 하면서 자라난 세대들은 비교적 기회도 많고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학교가 지금의 형태로 계속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할까.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유지되는 이유는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줄 세우기를 통해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기가 너무 수월한 시스템이다. 모든 학생들을 줄 세우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승자와 패자가 생겨나고 1등부터 꼴등까지 순위를 매길 수가 있다. 그걸 노력이라는 단어로만 평가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학교라는 공간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높이고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교육 스케줄에 의해 낙오된 학생과 사교육등과 사는 곳에 비례하여 안착한 학생으로 구분하게 한다.


학세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등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를 의미한다. 물론 학세권에서 떨어져 있는 아파트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안정적인 교육환경에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아이는 불편한 통학환경에 놓여야 하는 것이 맞을까. 모든 학교에 운동장이 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체육활동의 시간은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학교라는 공간을 쪼개서 학생들의 밀도를 더 낮추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1층 혹은 높아야 2층정도 규모에 학년별로 구분한다던지 학급수를 줄여서 학교의 규모를 줄여서 여러 곳에 분산하는 것은 어떨까. 대신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과 접할 수 있도록 공간구성을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금의 교육시스템은 학생들을 통제하고 학습과정을 효율성만 강조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계속해서 바뀐 것은 입시제도뿐이다. 자연을 좀처럼 접하지 못하고 빛나는 해를 볼 시간도 부족한 12년을 보낸 아이들은 한국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런 한국에서 자라난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이나 출산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현재 행복하다고 느끼고 미래에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더 높다면 분명히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행복하지 않고 미래에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면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노력을 할 뿐이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교폭력은 가정적으로 불우하고 폭력적인 아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최근 십여 년 전부터는 그 가해자의 유형이 바뀌었다. 권력위계가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모의 공부나 특정운동을 잘하는 아이에게서 학교폭력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의 그대로 학교에 반영이 되고 있다. 그런 형태의 학교폭력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의 구조가 완전히 바뀌고 지금처럼 학생의 능력이 몇 개의 과목으로 평가되는 것이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바뀌지 않는다면 더 은밀해지고 악랄해질 가능성이 높다.


학교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사회에서 나갈 때 배워야 할 관계에 대해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지금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에 좋은 때다. 교육이라는 밀도가 과거의 관점에서 바뀔 필요성이 있다. 수학이나 영어등의 비중이 너무나 높아서 변별력을 가지기 위해 더 어려워지고 난해해지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높은 수준의 수학이나 영어가 필요하지가 않다. 특정과목의 밀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수반된다는 의미다. 그 높은 밀도에서 변별력을 높이려면 자연스럽게 시험출제의 난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교육과정으로 소화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속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질량만이 증가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정작 원하는 것은 빛의 속도인데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질량으로 전환이 되며 무제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모든 수준이 빛의 속도가 될 필요성이 없다. 빛의 속도가 필요한 아주 협소한 분야가 있고 세상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나머지가 있다. 교육 역시 그렇게 사교육을 하고 돈을 들이고 줄 세우기를 하기 위해 특정과목에만 집중할 이유가 없다. 수학이나 영어가 필요한 분야가 있을 뿐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교육의 밀도가 적당하게 유지되고 있지 않다. 어떤 분야는 너무나 밀도가 과도하고 어떤 분야는 밀도가 너무나 작다. 문제는 그렇게 경험했던 밀도는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입시라던가 어떤 통과점이 아닌 사람생애 전반을 위한 교육의 밀도를 조절하지 않는다면 행복의 밀도는 낮아질 것이며 그 결과로 결혼, 출산에도 모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두 다른 선에서 출발해서 받는 교육이 평생을 좌지우지한다면 학창시절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청소년이라는 표현은 어른이 되지 않은 존재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학생수의 부족으로 폐교가 되는 대학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교육과정을 통해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다양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실패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나침판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길을 알려줄 것이다.


자신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에 대해 부모가 결정하거나 주변환경이 한계 짓거나 나아가서 사회가 색안경을 쓰게 만든다면 교육은 삶에 대한 사랑보다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만들뿐이다. 각자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솔직함과 진리에 대한 사랑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법과 삶을 어떻게 다채롭게 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열망을 가르치는 것이 온전한 교육의 목적이 아닐까. 매일매일이 ‘새로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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