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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밀도

사람답게 사는 노동, 사람처럼 사는 노동의 차이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산업화를 거치고 있을 때 전태일 열사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동자의 권리를 안착시켰던 사람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 노동강도를 버틸 수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노동은 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플랫폼 노동이 확산되면서 예전같이 정해진 시간내에 근무하는 유형도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다. 노동시간과 수명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연구한 결과물은 많지가 않지만 과거의 사례로 볼 때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일과 노동의 균형을 맞추는 워라벨이 있는 삶은 적어도 심리적인 만족도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1834년, 영국은 구빈법 혹은 빈민 구제법을 새로 개정했었다. 이 법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지출이 너무 커져 몸이 성한데도 피구호민인 노동자를 도덕적인 실패자로 보는 보다 엄격한 철학에 입각하고 있었다. 공리주의자들이 만든 법에는 공리적 원칙에만 집착하여 새로운 폐단을 양산했다.


산업혁명 이후에 빠른 성장을 하던 영국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비인간적인 조치들이 강행되었다. 그런 사회분위기를 반영하여 1837년 찰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어릴 때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랐던 기억이 난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올리버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비참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데 가혹한 장의사에게서 벗어난 올리버는 악행을 가르치려는 지하 세계의 위협과 그럼에도 선한 의지를 잃지 않으려는 심리적인 대립을 그렸다. 사회 분위기가 비인간적인 처우가 만연한 것이 되면 사용자는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한국사회에도 사용자의 갑질로 인한 문제가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찰스 디킨스는 사회 빈곤이나 부조리한 사회계급,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마다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19세기의 영국보다 더 나아진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밀도는 과연 괜찮을까. 2023년에는 1주일에 일할 수 있는 노동시간의 확대가 이슈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화끈하게 일해서 돈 좀 더 벌고 화끈하게 몰아서 쉬자는 이야기다. 화끈하게 일한다는 것은 노동시간이 사적인 생활을 대부분을 채운다는 의미다. 문제는 그 시간에 돈을 잘 벌어야 한다. 잘 번다는 것은 화끈하게 쉴 때 쓸 돈이 많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부족한 돈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돈을 조금 더 벌고 기절하듯이 긴 시간을 쉬는 것은 골병만 들고 삶의 만족도는 떨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회사를 다닐 때나 일을 할 때 몰아서 일을 해본 경험이 정말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는 시간이 쉬는 것 같지가 않다. 길게 쉬어도 쉽게 회복되지가 않는다. 사람의 바이오리듬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사람은 아침형 인간이나 저녁형 인간을 구분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밤에 생활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지 않다. 만약 궁금하다면 한 달 정도 햇빛을 안 보는 생활을 해보면 몸의 변화가 어떤지 몸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사라질 것 같은 우울한 감정을 모두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기네스북에 오르게 할 목적이라면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OECD의 평균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중대한 질병의 발병률이 적다는 의료적인 통계치도 도출할 수도 있다. 노동의 시간은 분명히 미래에 한국의 성장동력에 문제를 만들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있다. 노령인구는 늘고 출산율은 줄어들어 통계적으로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니 가용한 인력을 더 많이 돌린다고 하면 최소한 그 시기는 뒤로 늦출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는 있을 수는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적정한 시간을 일하고 괜찮은 임금을 받고 싶을 것이다.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이상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정해진 근무시간에 맞춰서 일할 수 있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다. 노동의 밀도는 삶의 만족도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노동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기회를 놓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을 만날 시간도 없고 취미, 운동을 할 시간조차 줄어들게 된다. 청년세대들은 과거 20세기 고도의 산업발달에 따른 실업현상처럼 취업을 아예하지 않은채 빈곤한 상태에 머무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일을 하지 않고 차라리 쉬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문제에 불과한 것일까. 열심히 일해도 한국사회의 평균정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면서 살아간다. 노동의 사전적인 의미는 식량·의복·집 등 인간의 기본적인 물리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을 의미한다. 기능이라는 것은 사람의 존엄적인 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면서 몸에 좋은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정신적인 일을 하면서 창조적인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는 적당한 노동의 밀도가 필요하다. 차가운 기계처럼 필요한 에너지만 주면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판단하면서 만족할 수 있는 존재이며 꾸준하게 손실과 회복을 순환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적어도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그 시대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언급하지 않아도 시간이 갈수록 경제규모가 커지고 전체 자본의 규모는 커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실물경제에서 사용되지 않은 자본이 더 많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노동보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경제적인 가치가 더 커지고 있다. 단지 그 커진 돈들이 주머니에 직접적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저임금은 힘들게 올리고 있지만 누군가는 노동을 제공하지 않고도 토지를 기반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헨리 조지라는 경제학자는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라는 책에서 토지가격 상승과 임대료 상승을 통해 돈을 버는 구조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도 토지자체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토지는 자연적인 재난이 아닌 경우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살기 시작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 와서 삶을 영위한다. 도시는 국가 주도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밀도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자본가나 토지소유자, 노동자등 모든 사람이 같이 도시를 형성한다. 특정계층이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생각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현실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사람처럼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수준정도는 되어야 만족한다는 의미다. 전자나 후자 어떤 삶을 선택하더라도 옳고 그름이 있거나 도덕적인 우월함이 있지는 않다. 노동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회에서 쓸 수 있는 지폐라는 사용수단으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라면 대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많은 양의 지폐로 바꾸고 싶어할 것이다. 그걸 사회에만 맡겨두면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니 시스템과 법의 제약을 두고 최소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노동은 단순하게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기만족에 대한 중요한 척도이며 쾌락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산업화시대에 전혀 다른 노동에 대한 수요가 창출되었듯이 기계화와 AI의 확산으로 인해 생각하지도 못한 노동에 대한 수요가 만들어질 것이다. 노동은 행복의 밀도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를 결정하는 기초공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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