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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불평등

저울의 균형추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불평등은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국가와 체제가 바뀌더라도 영원한 굴레 속에 갇혀서 보여지는 모습만 다를뿐 계속 반복된다. 불평등은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에서 표현한 보이지 않는 손처럼 보이지 않게 해소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면 절대 해소되지 않고 희망적인 미래도 쉽게 볼 수도 없다. 불평등을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남들과 다른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원동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전세계의 일부 왕정국가들을 제외하고 봉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신분의 차이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의 시스템이 유지되는 근간에는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시장은 개인에게 노력 혹은 능력대비 합당한 몫으로 돌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의 전체 총량은 커지고 있지만 시장은 일반 사람들이 부의 불평등을 해소시켜주지 않는다.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을 때 큰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사회 불평등 이슈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각자의 방법으로 노동시장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항상 미완의 과제와 갈등을 만들면서 다음 정권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한국의 사회에서 성공에 대한 갈망은 자신도 가능할 것 같다는 기회의 사회와 어떠한 노력에도 갈 수 없는 한계의 사회가 충돌하면서 남녀간의 애증관계처럼 맞물려 굴러가고 있다.


정부의 고위공직자가 되면 달콤한 선택 중에 하나가 바로 시행령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을 바꾸는 것은 입법기관인 국회의 협조가 필요하고 시간과 돈도 많이 든다. 그렇지만 시행령은 법을 바꾸지 않아도 문구 추가나 수정으로 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행령은 마법의 방망이와 같다. 특정 개인, 조직, 국가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 먹고 살기에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총리나 장차관, 고위공무원을 기를 쓰고 하려는 이유는 돈이다.

일반 국민들 중에 시행령이 어떻게 바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시행령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공시된다. 그렇지만 그 시행령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살펴봐야 한다. 김앤장과 같은 대형 로펌들은 대기업과 국가에게 큰돈을 받고 로비를 한다. 국무총리 출신이나 장차관 출신 혹은 장성 출신들에게 많은 돈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고문의 역할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로비를 통해 정부의 시행령을 바꾸고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민자투자로 만들어진 도로나 각종 시설을 보게 된다. 어떤 결정과정을 거쳐 시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이나 도로를 민자투자로 돌렸는지 알 수가 없다. 사업타당성조차 현실에서 볼 수가 없는 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수익보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정부나 지자체가 채권을 발행해서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이다. 그렇지만 해당 외국회사나 국가에서 돈을 받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될까. 투자회사에게 큰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시행령을 바꾸고 사업의 방향을 바꾸면 된다. 미래의 수익은 장밋빛으로 그리고 그 손해는 정부와 지자체가 채워주는 방식으로 판을 짜면 된다. 그래서 고위 정부 관료 출신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기반시설에서도 불평등을 벗어날 수는 없다. SOC사업에서도 시장우선 주의는 선택받지 못한 소수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이 받을 손해는 상관이 없다. 국민 삶의 질이 어떻게 바뀌는 것이 대체 뭔 고민인가. 어차피 국민들은 정부 세금이 어떻게 설계되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정부의 방향은 선한 방향으로 가도록 되어 있지만 설계를 하는 주체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과도하게 돈을 받아도 능력주의라고 포장하면 그만이다. 정치는 진보처럼 보이든 보수가 되든 간에 각자의 모습으로 탐욕스러운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인들의 이동할 권리나 비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기 위한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을 요구하며 지하철 시위를 하면서 차별에 대한 이슈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었다. 그렇지만 언론이나 정치인들 누구도 본질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위한 관점과 그걸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혀도 된다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보편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계류된 지 오래되었다. 보편적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슈만 부각될 뿐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은 다루어지지 않는다. 보편적 차별금지법은 사실 대다수의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차별을 받기를 원하고 차별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입장에서 다른 이들보다 괜찮은 대우를 받는 입장이 되면 불평등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비장애인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이, 성별, 종교, 학벌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인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차별되기 위해 돈을 쓰면서 살아간다. 돈을 썼는데도 차별받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화가 날 것이다. 놀이시설에서조차 특별한 입장권을 구매하면 다른 사람과 같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특정한 경로를 통해 입장하던가 개장시간 이전에 들어갈 수 있게 배려를 해주기도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국가도 많은 것에서 차별을 한다. 사회적 배려라고 하지만 그 배려는 누군가에게 차별이 된다. 청년 주택이나 신혼부부들을 위한 배정이나 청년 적금, 청년 창업지원등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


면접을 당해보기도 했고 면접을 하기도 했지만 차별과 선입견은 어느 곳에 나 있었다. 차별이라는 기준은 정말 모호하다. 어떤 것이 차별인지 아닌지는 사회적.법적 기준도 있지만 주관적인 기각으로 자신이 그렇게 느끼면 차별이 될 수도 있다. 부모들이 아이 때부터 조기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학교나 좋은 직업 같은 허울은 결국 남들을 차별하기 위함이거나 차별당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기득권들이 가장 싫어하는 법안 중 하나가 바로 보편적 차별 금지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주요 대기업을 보면 어느 지위를 넘어서면 특정학교와 지역으로 채워지게 된다. 능력 따위는 상관없다. 어차피 그 정도 규모의 회사가 되면 어느 누구를 넣어놔도 시스템은 돌아간다. 어설픈 평등론자가 들어와서 차별의 성에 금이 가게 하기는 원하지 않는다.

당장 취업사이트나 각종 공모전이나 대외활동의 모집요건을 보면 나이, 성별, 지역 등에 제한을 둔 것을 볼 수 있다. 지역마다 지원하는 청년창업이나 거주요건은 나이 제한이 있다. 그건 차별이 아닌가. 나이는 과연 시간적인 것에 국한되어야 하는 게 합리적인가. 과거에 정해놓은 기준은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 전국적으로 돌아다녀보면서 만난 학교나 마을 입구 등에 걸려있는 플래카드의 문구들은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회의 본모습이기도 하다.

사회를 하나의 잣대와 성공으로 줄 세워놓는다면 모든 것은 불평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권을 이야기하고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사람들조차 그들이 보는 차별의 시각은 딱 거기에 머물러 있다. 자신이 아는 차별은 차별이지만 다른 곳에도 존재하는 차별은 느끼지 못한다. 필자는 이 사회가 과연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 당해봐야 비로소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이나 불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경제력으로만 본다면 세계 10위권의 한국의 부패지수는 40위권에서 머물러 있다고 한다. 압축성장을 한 한국은 경제규모는 빠르게 성장했으나 의식 수준은 그 수준에 맞게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일인당 GDP가 100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이 30,000달러를 넘었던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시대를 살아왔다. 그렇지만 지금 세대는 이미 10,000달러를 넘어선 시대에서 태어나 풍족한 세상을 보면서 자라났다. 앞으로도 30,000달러대인 GDP는 쉽게 더 높아질 것 같지는 않다.

일명 MZ세대로 불린 이들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부모세대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족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성장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라고 있는 세대에게 부족해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말하면 설득이 될까.


문제는 앞으로 한국사회의 성장동력이 신뢰에 기반해야 된다는 것이지만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살기가 쉽지 않다. 한국은 엘리트형 카르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회조차 박탈을 당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낮은 부패지수를 보이고 있는 싱가포르의 경우 고위공직자나 법조인들에게 대한 잣대가 정말 엄격하다. 그 결과 많은 세계기업들이 싱가포르에 투자를 한다. 지금도 싱가포르 국민들은 노력을 하면 그 성과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계기업들이 어떤 나라에 투자를 하는 것은 법인세가 낮기 때문이 아니다. 신뢰에 기반하며 투자를 했을 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결정을 하는 것이다. 부패지수가 낮은 국가에서는 법조인들의 카르텔이나 전관예우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언론인들도 이해관계에 의해 사실을 왜곡하던가 진실같은 거짓을 발표하지도 않는다.


카르텔이라는 것은 이권을 독식하려고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끼리끼리의 문화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한다. 자신이 노력한 것에 과도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장벽 밖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기에 불평등은 더 심화될 수 밖에 없다.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에 지속적인 균열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감시와 감독을 해야 될 대상과 그 주체가 네트워크를 이루게 되면 사회문제에는 눈을 감고 이권에는 관대함을 보인다.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조차도 자신이 하는 일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부패했다고 생각하는 존재는 자신이 부패했다고 생각을 안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권리에 취하고 나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결국 막다른 길에 이르던지 더 큰 부패를 저지르는 존재가 된다. 부패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신뢰다. 부패한 사회는 더 이상 정상적인 노력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게 된다. 신뢰가 없는 사회가 어떻게 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할 수 있으며 발전동력을 얻을 수가 있을까.

70, 80년대와 90년대에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던 세대들은 자신의 자식세대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을 시도하고 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패한 공직자나 정치인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런 위치에 놓일 경우 인정에 호소한다. 부정하게 돈을 축적했어도 그걸 부러워한다면 영원히 부패지수는 낮아질 수가 없을 것이다. 공자는 시 305편을 산정한 후에 사무사(思無邪)라고 말하였다.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르면 모든 사물에서 바름을 얻게 될 것을 설명한 말이다. 부패는 생각에 간사함이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바르다고 생각해서 벌이는 일이다.


사회의 불평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사회 부적응자들을 만들기도 한다. 역사에서 국가간 불평등 조약을 통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착취하기도 했고 현대적인 모습의 국가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 지역불평등, 교육불평등, 사회적 불평등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차별이 있어서 고르지 못한 사회는 미래가 없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한쪽으로 치우침이 너무 심화되면 더 이상 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항상 평등한 사회는 이룰 수는 없지만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저울의 무게를 비슷하게 맞추어가는 사회적 발걸음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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