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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어야 참된 삶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보면 전형적인 사회의 부적응자의 삶이면서 기존의 질서와 갇힌 사고를 거부하는 작가 카뮈의 자서전을 보는 것만 같다. 사회는 질서를 만들고 지위와 사람에 대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놓으려고 한다. 그 속에서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옳은 길처럼 생각하지만 자신, 가족, 조직, 지역을 중심으로 판단하기에 수많은 인생 변수 속에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소설 이방인에서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 세계와 자신의 삶에서까지 소외된 철저한 이방인 뫼르소가 소설 속 주인공이다. 알제리에서 태어나 1942년 첫 소설 ‘이방인’을 낼 때만 해도, 카뮈는 프랑스 문단의 이방인이었다.

세상에 부조리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글쎄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의미한 메아리이며 정의 없는 힘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전에는 좀 더 부조리했고 지금은 조금 더 정의로워 졌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그때는 노골적이었다면 지금은 더욱더 은밀해졌고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적인 부조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항상 이방인을 생산하고 착취를 통해 더 큰 부를 누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는 미래의 꿈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지금 이곳의 살인과 공포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개인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연애관이나 결혼생활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세계에서 표현된 느낌은 괜찮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정신적인 공허를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간 작품들은 많았다. 그만큼 세계 대전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으며 주옥같은 작품들도 그 시기에 나왔다.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가상의 원심원을 그리듯이 세상을 인지한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원심원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세계는 관심이 없던지 때론 적대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살인범들이 등장하지만 우리는 그 잔인성과 어떤 사람을 어떻게 죽였느냐에만 관심을 가진다.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굳이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철학적인 고심 없이 그냥 자극적인 말로 뉴스로 생산해내기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혹해서 볼 수 있도록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말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달라질 것이 없다. 재판에 가면 판사들이 알아서 형량을 내릴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는가를 알려주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이방인에서 살인을 하였으며 일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상승 욕구나 야심이 없고 생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 ‘무관심한’ 뫼르소가 왜 살인을 했는지에 타당성을 주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발적 살인 이후 뫼르소는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세상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더 많은 것을 보는 사람을 최대한 외면하려고 한다. 다양한 관점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기보다는 통념을 깨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맞다고 주입한다. 부모세대가 그러했고 지금세대들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지금까지 성장해온 과정을 보면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한 토착세력과 이후 계속 이민을 해온 외국인들이 이방인에서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비슷한 얼굴과 DNA를 가진 한국보다 이방인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문화가 자리한 곳이 미국이다. 한국 역시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해 노동자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아직 안착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미래에 일자리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인 이슈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릴 때는 이방인에서 출발해서 사회인으로 편입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판단에 좌지우지되고 타인의 생각을 미칠까 봐 두려워한다. 그게 사실이었어도 숨기려고 한다. 경제적인 이득이나 타인의 관점에서 본 자신의 이미지 때문이다. 이방인에서 타인에 의해 내려진 사형 선고를 받으며 뫼르소는 마지막 유혹, 신앙과 구원의 유혹을 떨치고 자신의 죽음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면서 스스로 완전해지고 동시에 고립되며 사라지게 된다.


한국은 외국인과 같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중에 줄어들어가는 경제활동인구로 인한 노동력이나 부족해지는 대학생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것도 있다. 유럽과 같은 수많은 나라들은 이미 이민자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외국인들에게서 채우는 것은 한국인들이 그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한국인들이 그런 일을 안하기 때문에 외국인을 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은 한국에서 살기에 유용한 일자리가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그런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은 반려자를 만나기도 어렵다. 즉 단기적이며 입지도 좋지 않으며 급여수준도 높지가 않다. 한국보다 GDP가 낮은 국가에서는 그 수입이 큰 돈이지만 한국에서 결혼과 아이를 낳고 살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런 부족한 조건을 한국인에게 제시하면 인력을 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닌 주류가 되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회가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이방인이 된 사람들은 때론 범죄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다. 한국사회는 점점 더 이방인을 차별하고 외면해가는 것처럼 나아가고 있다. 학벌, 직업, 거주지등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재단하기도 한다. 부조리는 항상 어디에서든 존재한다. 개인의 욕구와 현실의 불일치속에서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부조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1913년에 출생한 카뮈는 195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프랑스인으로 9번째 수상이자 최연소 수상으며 2년뒤인 1959년, 카뮈는 쓰다가 중단했던 '최초의 인간'을 다시 쓰기 시작했지만, 이 작품은 1960년 1월 4일,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미완으로 남게 된다. 누군가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해지면 피카소나 카뮈처럼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카뮈는 신화가 되었다. 그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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