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기억 상점

"어떤 기억을 원하세요?" 나만의 기억을 피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떤 기억을 원하세요?"


상냥하게 보이는 여직원은 화려한 윈도 뒤에 다채롭게 놓여 있는 기억상품들이 뇌를 자극하고 있었다. 최수정은 기억 상점을 처음 이용한 것이 3년 전이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이용했는데 신세계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담배처럼 피기만 해도 30분간 동안 프로그래밍된 기억을 마치 직접 경험한 듯이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점점 흐려지면서 1주일 정도면 기억이 휘발되듯이 사라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매력이 있었다.


"스위스를 친한 친구와 함께 3박 4일 정도 여행하는 기억은 있나요?"

"예 유럽여행 시리즈 중에서 스위스 편이 업그레이드되어서 나왔어요. 요즘 3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수정은 직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화려한 윈도에 잘 정리된 기억상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패키징이 되어 있는 기억상품들은 직관적으로 어떤 기억을 경험해 볼 수 있는지 디자인이 되어 있었다. 마치 예술가가 작업을 해둔 것 같은 패키징을 수집품처럼 모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떤 기억상품들은 단종이 되기 때문에 리셀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았다. 수정은 자신이 선택한 기억상품을 결제한 뒤에 기억상점을 나섰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행이 쉽지 않았던 수정은 스위스 여행에 대한 경험을 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어떤 기억을 경험할 수 있을까란 기대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소보다 짧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수정의 얼굴은 조금 들떠 있었고, 그 표정이 낯설어 잠시 시선을 피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투룸의 분위기가 몸을 감쌌다. 현실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잠시 미뤄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기억 상품은 어디에서나 할 수가 있지만 안전한 곳에서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마약과 같은 뇌를 망가트려가면서 만드는 환상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기억을 경험하는 것은 안전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기억상품은 이쁘게 디자인된 손바닥만 한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단정하고 과도할 만큼 아름다운 디자인의 표지에는 ‘스위스, 3박 4일’이라는 문구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감정 잔여감 최소화 버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수정은 그 문구를 한 번 더 읽고는 웃었다. 감정이 남지 않는 기억이라니,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수정은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메모리아 랩스라는 회사의 주식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기억 상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 세계에서 매년의 매출이 100%씩 성장하고 있었다.


수정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장치를 연결했다. 익숙한 방식이었다. 기억상품을 흡입한 뒤 눈을 감자, 어둠 뒤에서 천천히 빛이 번졌다. 처음에는 공기였다. 스위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차갑고 맑은 공기.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폐 안쪽까지 시원함이 스며들었다. 눈을 뜨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푸른 호수와 그 위로 비친 알프스의 능선이었다. 옆에서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얼굴은 또렷했고, 웃음소리는 현실보다 조금 더 경쾌했다. 기억 속의 시간은 매끄럽게 흘러갔다. 기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초원, 작은 카페에서 나누는 의미 없지만 여자들만의 수다, 누구나 머물고 싶은 숙소에서 마신 와인의 온기. 모든 순간이 과하지 않게, 그러나 부족하지도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수정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점점 빠져들었다. 이건 가짜라는 걸 알지만, 느끼는 감정만큼은 진짜였으니까.


특히 기억에 남은 건 마지막 날이었다. 해 질 무렵, 호숫가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순간. 친구는 갑자기 말했다.

“이런 시간, 수정이와 언젠가는 진짜로 와도 좋겠다.”

그 말에 수정은 이유 없이 가슴이 조여왔다. 프로그램된 대사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눈을 뜨자 다시 투룸의 천장이었다. 장치는 자동으로 종료되었고, 창밖에서는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몸은 그대로인데, 마음만 멀리 다녀온 기분이었다. 수정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마치 여행 이후의 피로감이 밀려오는 듯했다. 며칠 동안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가벼웠다. 스위스의 공기가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안내받은 대로, 기억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호수의 색은 바래고, 친구의 얼굴은 윤곽만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여행이 실제였는지, 상품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어느 밤, 수정은 문득 생각했다. 이 기억이 사라지면, 남는 건 무엇일까.

달력을 보니 아무 표시도 없는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정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결심을 했다. 기억상점에 다시 가는 대신, 근처 공원이라도 걸어볼까.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일지라도, 이번에는 지워지지 않는 쪽을 선택해보고 싶었다.

현실은 언제나 조금 부족하고, 그래서 더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만 남는 감정도 있다는 것을, 수정은 이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층고가 4미터쯤은 되는듯한 공간은 100여 평은 충분히 되어 보였다. 그 룸에는 화장실과 샤워실 공간을 제외하고 모두 열린 공간이었다. 침대와 요리공간, 거실은 하나로 열려 있었다. 숙박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공간의 창들은 모두 통창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의 스크린처럼 사용할 수도 있고 미디어등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23층에 자리한 이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메모리아 랩스의 대표 Ethan Kim이었다. 그가 가진 주식가치만 2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이름 김인수는 기억 상품을 만들게 되기까지 어릴 때의 기억이 큰 영향을 미쳤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관심했던 어머니 아래에서 김인수는 여동생인 김서희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이 성장했다. 김인수는 다른 평온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기억이 부러웠다. 타고난 머리 덕분에 김인수는 의대와 공대를 다니면서 의학적인 지식과 더불어 생명공학과 전자공학등을 모두 공부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자신만의 좋은 기억을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오늘날의 기억 상점의 토대를 만들 수가 있었다.


기억상점에 상품을 공급하는 메모리아 랩스 내부에는 공식 카탈로그에 존재하지 않는 분류가 있었다. 사내에서는 그것을 블랙 라벨 메모리라고 불렀다. 이 기억들은 단순한 여행이나 감정 체험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법적·윤리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기억들, 혹은 경험해서는 안 되는 감정의 깊이를 다루고 있었다.


메모리아 랩스의 블랙 라벨의 조건은 세 가지는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었다.

- 실존 인물의 기억을 기반으로 할 것

- 기억의 일부가 완전히 휘발되지 않을 것

- 사용자에게 정체성 혼선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 것


마치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Three Laws of Robotics) 같이 지켜져야 될 것이었다.


메모리아 랩스의 블랙 라벨의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았다.

- 죽은 가족과 마지막 하루를 보내는 기억

-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를 양육한 기억

- 타인의 삶을 “나”의 시점으로 살아본 기억

- 각종 폭력이나 학대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기억


이 기억들은 공식적으로는 회사 내부의 연구용 데이터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VIP 고객과, 메모리아 랩스 내부 임원들은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든 김은, 이사회와 더불어 그 모든 기억의 최종 승인자였다.


메모리아 랩스에는 엄격한 윤리 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안전장치에 가까웠다. 위원회 회의에서 항상 반복되는 질문이 있었다.

“이 기억이 인간의 자아 연속성을 침해하거나 기억중독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든 김은 늘 같은 답을 내놓았다.

“자아는 원래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기억 상품은 ‘경험’ 일뿐, ‘삶’ 그 자체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뇌 속으로 들어간 기억이 휘발되는 한, 인간은 안전하다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블랙 라벨 메모리는 그 전제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든 김은 자신의 기억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가진 기억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사람의 뇌는 단단한 머리뼈 안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불완전한 신체부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은, 최초의 비공식 기억 파일에는 김인수가 열두 살이던 해, 여동생 김서희와 함께 있었던 어느 저녁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기억이었다. 실제 기억에는 없던 요소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매일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귀가하지 않은 밤

어머니가 두 남매를 바라보며 웃던 얼굴

여동생이 “오빠”라고 부르며 잠드는 순간의 그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든 김의 뇌 속에서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 기억은 휘발되지 않았다.


불법 리셀 시장은 기억 상점이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그림자였다. 기억 상품은 휘발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지만,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찾아냈다. 기억이 사라지기 직전, 가장 선명한 감정 데이터만을 추출해 재패키징하는 기술은 과거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의 진화된 기법이기도 했다. 메모리아 랩스의 정식 서버가 아닌, 외부에서 불법적으로 개조된 흡입 장치들이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었다. 그 장치들은 기억을 경험하는 대신, 소유하게 만들었다.

리셀 시장에서는 기억이 이름이 아니라 코드로 불렸다.

— BL-07

— MTH-UNK-20Y

— HOME_1997-L

특히 비싼 가격에 거래되던 것은 블랙 라벨 메모리의 파편들이었다. 완전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의 잔향’이라고 불렀다. 휘발되지 않는 기억의 냄새 같은 것으로 사람의 뇌를 망가트릴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건은 새벽에 보고되었다. 메모리아 랩스 내부 모니터링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던 기억 코드 하나가, 불법 서버에서 활성화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코드는 짧았다.

CLUE_199701

이든 김은 화면을 바라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 기억은 누구에게도 공유된 적이 없었다. 연구 서버에도, 블랙 라벨 아카이브에도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그날 저녁, 서울 외곽의 한 원룸에서 한 여성이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었다. 기억 흡입 장치는 불법 개조된 상태였고, 장치 안에는 단 하나의 기억 로그만이 남아 있었다.

“오빠, 오늘은 무섭지 않아.”

그 여성은 기억을 끊지 못했다. 그녀의 뇌는 현실과 기억을 구분하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았던 평온한 저녁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이든 김은 그 여자의 얼굴을 보며 알았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왜 그 기억을 선택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누군가의 구원이 아니라 대체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그는 블랙 라벨 서버에 접속했다.

그리고 최근에 업데이트된 모든 로그를 열어보았다.

불법 리셀 시장에 유출된 기억들은 대부분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결핍을 채워주는 기억들이었다.


잃어버린 가족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

겪지 못한 평온한 성장기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되지 못한 사람의 기억을 원하고 있었다. 이든 김은 윤리 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대신, 내부 핵심 개발팀에 단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블랙 라벨을 폐기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완성시키지 마라.”

그가 선택한 것은 새로운 상품이 아니라, 결함이었다. 기억의 절정에서 반드시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구조가 있었다. 행복한 기억일수록, 끝에는 설명되지 않는 공백을 남기도록 설계했다. 상실을 대신하지 못하게, 오히려 상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기억.

개발팀은 그것을 내부적으로 이렇게 불렀다.

RETURN PROTOCOL

기억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경로여야 한다는 전제.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기억들이 흘러나가 있었다. 불법 시장은 그 결함조차 제거한 채 기억을 재가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장 한가운데에,

최수정이 사용했던 스위스 기억의 원본 감정 데이터가 발견되었다.

그 친구의 목소리,

“언젠가는 진짜로 와도 좋겠다”라는 그 대사는

실존 인물의 기억을 기반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이든 김은 그 로그 앞에서 오래 멈춰 서 있었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사람을 위로하는 기억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갖지 못한 삶을 대신 살아보게 하는 장치였을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비공식 기억 파일을 삭제 대기 상태로 옮겼다.

CLUE_199701

이 코드를 완전히 삭제하면, 그는 다시는 그 평온을 떠올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기억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또다시 그 자리에 머물러버릴 것이다. 이든 김은 화면에 손을 얹은 채, 생각했다. 기억 상점에서 구매한 기억을 파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불빛들 중 어딘가에서는, 오늘도 누군가가 기억을 선택하고 있었다.


불법 리셀 시장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일반 사용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또 다른 계층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기억은 더 이상 체험이나 소유가 아니었다. 불법적으로 기억 상품을 통한 기억의 이식이었다. 자신의 기억을 이식받으려는 쪽은 대개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돈 없는 젊은 청년, 파산 직전의 사람, 혹은 이미 사회적으로 사라진 존재들. 더 이상 자신의 기억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계약서에 이렇게 서명했다.

“본인은 자신의 기억 전부 혹은 일부를 제거하고 제삼자의 기억이 자신에게 이식되는 것에 동의한다.”

대신 남는 것은 얼마의 돈, 혹은 가족에게 남길 수 있는 보상금뿐이었다.

기억을 이식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더 이상 본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식된 기억은 단순히 뇌에 저장되지 않았다. 기억과 함께 판단 습관, 감정 반응, 말투, 선택의 방향성까지 함께 옮겨졌다.

금전적인 지원과 함께 받는 사람은 처음엔 그것을 도움이라고 느꼈다.

이전보다 “나답지 않은데, 더 나은 나”가 되는 기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균열이 생겼다. 거울 속의 얼굴은 분명 자신인데 선택하는 삶은 점점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동조성 붕괴라고 불렀다. 서울 강남의 한 허름한 오피스텔에서 발견된 남성은 본래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6개월 전부터 갑자기 삶이 달라졌다. 그는 갑자기 피아노를 연주했고,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의 길을 정확히 기억해 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이 삶을 한 번 살아봤어.”

조사 결과, 그의 뇌에서는 세 명의 기억 서명이 동시에 검출되었다. 그중 하나는 이미 사망 처리된 인물의 것이었다. 그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을 본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기억의 원주인 이름으로 소개했다.

그날 이후, 언론은 이 현상을 이렇게 불렀다.


대체 인간 사건

이든 김에게 보고서가 전달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술이 한 인간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기억은 휘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식된 기억이 원래의 자아를 밀어내고 있었다. 블랙 라벨 메모리의 세 가지 금지 조건은 이미 모두 깨져 있었다.

실존 인물 기반 ✔

휘발되지 않음 ✔

정체성 혼선 ✔

이건 메모리아 랩스의 기억 상품이 아니었다. 존재 이전 기술이었다.


불법 시장에서는 이 기술을 이렇게 불렀다.

LIVING TEMPLATE

“그 사람처럼 살아주게 하는 것.”

어떤 부유한 고객들은 이미 사망한 천재의 기억을 이식해 그의 판단력으로 회사를 운영했고, 어떤 이는 잃어버린 연인의 기억을 이식받아 그 사람처럼 말하고, 선택하고, 사랑했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기억을 판 사람은 사라졌고,

기억을 이식받거나 산 사람도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되었다. 이든 김은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것은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 대체 가능한 인간의 설계도였다는 것. 그날 밤, 그는 블랙 라벨 서버 최심부에 접속했다. 그곳에는 아직 누구에게도 이식되지 않은 기억 하나가 있었다.

KSH-UPDATE


여동생 김서희의 전 기억 데이터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기억이 유출된다면, 누군가는 김서희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그가 끝내 지켜주지 못한 삶이 된다. 이든 김은 서버 앞에서 손을 떨며 생각했다. 기억을 남기는 것이 죄라면 기억을 지우는 선택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모든 LIVING TEMPLATE의 근간이 되는 알고리즘에 단 하나의 명령을 입력했다.

“기억 이식 시, 원주인의 정체성 핵심을 무작위 붕괴시킨다.”

이 선택은 불법 시장을 붕괴시킬 것이다. 동시에, 이미 이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도 함께 무너뜨릴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들어 있었다. 그 아래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든 김은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기억을 지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최수정은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가장 사소한 순간에 깨달았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다가, 무심코 거스름돈을 받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80%의 확률로 비가 올 확률이 높네요.”

점원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기상청에서 일하세요?”

수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확률을 계산한 기억도 없고, 뉴스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그런 순간들이 잦아졌다.

처음 가보는 골목에서 길을 헤매지 않았고, 처음 만난 사람의 성격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짐작했다. 어떤 선택 앞에서도, 망설임보다 확신이 먼저 도착했다. 마치 이미 한 번 살아본 삶처럼. 메모리아 랩스 내부 서버에서, 최수정의 이름이 처음으로 RED LINE으로 표시된 것은 그녀가 더 이상 기억 상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기록한 이후였다.


그녀의 뇌파는 안정적이었다. 기억 중독의 흔적도, 정체성 붕괴의 전조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여러 개의 기억 서명이 겹쳐 있음에도, 자아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기억 이식에 의한 자아 붕괴 없음.”

“기억과 자아의 자연스러운 통합 발생.”

불법 이식 사례 수백 건 중, 완전한 안정 상태를 유지한 사례는 단 하나였다.


최수정!

이든 김은 그 이름을 보고 한동안 화면을 끄지 못했다. 최수정의 기억 이식 기록은 불완전했다. 누군가의 전 생애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억 파편들이 의도 없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것은 설계된 상품이 아니었다.

불법 리셀, 블랙 라벨 파편, 감정 잔여 데이터— 모든 오류가 우연히 하나의 사람에게 모여든 결과였다.

그런데도 최수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억을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 최초의 인간처럼 보였다.

이든 김은 그제야 이해했다.


기억이 위험한 이유는 많아서가 아니라, 자아보다 앞서기 때문이라는 것을. 수정은 기억을 따르지 않았다. 기억을 경험한 뒤 선택했다. 그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었을 때,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갈라졌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기 시작했다.


기억을 가진 자들은 그들은 기억 이식을 통해 더 나은 판단, 더 빠른 적응, 더 효율적인 삶을 얻었다. 기업의 핵심 인재, 정치 자문, 의료 판단 시스템 등은 AI를 넘어선 우월하다는 인간들의 장점을 하나로 모았다. 모든 곳에서 기억 기반 인간이 선호되었다.

그들은 말했다.

“기억을 거부하는 건 진화를 거부하는 거야.”

기억을 거부한 자들은 그들은 기억 이식과 상품 사용을 모두 거부했다. 느리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삶을 택했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실패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어.”

도시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뉘었다. 학교, 직장, 주거 구역까지. 기억은 이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신분에 가까운 기준이 되었다. 최수정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억을 옹호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기억 상점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공원을, 골목을, 이름 없는 길들 과 비효율적이고, 목적 없는 선택들. 하지만 그 선택들만이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수정은 알고 있었다.

이든 김은 메모리아 랩스를 떠났다. 회사는 남았고, 기술도 남았으며 각종 로비를 통해 성장은 지속이 되었다. 기억을 원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억을 만들었지만, 기억 이후의 책임까지 설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쩌면 기억의 완성형은 더 많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저녁, 수정은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의 움직임이 느렸고, 그 느림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물었다.

“기억을 다시 살 기회가 있다면, 선택하지 않으실 건가요?”

수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살았거든요.”

“이번엔 그냥… 처음인 채로 살고 싶어요.”

도시는 여전히 기억을 사고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하늘만큼은 아무에게도 이식되지 않은 채, 모두에게 똑같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인간이라는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날 밤, 수정은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기억 상품 케이스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미국, 스위스, 바다, 어린 시절의 여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이름조차 잊힌 도시들. 그녀는 그중 하나를 꺼내려다 멈췄다. 손이 닿은 것은 상품이 아니라, 케이스 바닥에 숨겨진 작은 종이 태그였다.


USER LOG : MS-021723

통합 안정도 99.8%

RETURN PROTOCOL 비적용

자발적 선택 유지

수정은 그 문구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완성형’인 이유가 기억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을 끝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며칠 뒤, 정부는 새로운 기준을 발표했다. 기억 이식 여부는 공개 정보로 분류된다. 취업, 보험, 주거 계약서에 ‘기억 보유 단계’ 항목이 추가되었다.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기억을 가진 자인가, 아니면 이식된 기억을 거부한 자인가. 수정은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

“그게 지금의 나를 전부 설명해 주나요?”

대부분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편, 해외의 한 연구소 서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패킷 하나가 감지되었다.

코드는 단순했다.

MS-021723

그 패킷에는 기억 데이터가 없었다. 개성도, 경험도, 감정도, 판단 알고리즘도 없었다. 오직 하나의 로그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음.”

“기억 없이도 살아감.”

연구진은 혼란에 빠졌다. 이건 기억 이식도, 거부도 아닌 제3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수정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실수하고, 누군가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어떤 풍경은 느렸고, 비효율적이었고,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정은 그 모든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가 화면에 떴다.

“당신처럼 살 수 있을까요?”

수정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이후로 기억을 사고파는 세상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더 나은 삶을 원했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기억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택한 건 뭘까?”

그리고 그 질문이 시작되는 곳마다, 메모리아 랩스의 서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오류가 하나씩 쌓여갔다. 기억이 없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는 오류. 이야기는 끝났지만, 인간은 아직 진화되지 않았다.


“기억을 사고파는 미래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처음 겪는 삶’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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