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선비, 조헌

조헌선생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던 창주서원과 두암리 삼층석탑

자신이 말을 했으면 지키고 직접 행동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특히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을 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선비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신의 설자리를 좁히는 직언으로 일관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옥천에 잠들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우고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서 왜군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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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올해도 나무를 심을 때가 다가온다.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과일을 수확하기 위한 작업을 봄에 해야 한다. 그때 바빠지는 곳이 바로 옥천군의 이원면이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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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에는 3.1 운동 기념비, 경현당, 곽은재실, 두암리 삼층석탑, 김문기 유허비, 송갑조 유기비, 밀성박씨 사당, 창주서원 묘정비, 대성산, 월이산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창주서원 묘정비와 두암리 삼층석탑을 만나보기 위해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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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는 창주서원 묘정비가 마을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창주서원은 본래 선조 41년(1608)에 조헌선생을 제사 지내기 위해 묘소 앞에 세웠던 표충사였다고 한다. 인조 2년(1636)에 조헌의 묘를 안남면 도현으로 옮긴 뒤 인조 24년에 이원면 원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효종 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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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는 숙종 8년(1682)에 창주서원을 사액을 받았다. 이 비는 장방형의 기초석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비신 위에 기와지붕 모양의 비 갓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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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을 일으켜서 공주의 영규대사의 승군과 합류하여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왜군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하게 된다. 그들이 맞이하게 된 사람은 왜장 중 능력이 출중하기로 잘 알려진 고바야가와 다가가게라는 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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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700여 명을 데리고 금산에서 왜군을 맞이했으나 인원이나 무기에서 모두 열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금산에는 그날의 흔적인 칠백의총이 남아 있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인 조헌은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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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서원 묘정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옥천 두암리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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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기단 위에 탑 몸돌 부분을 올렸고,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석만이 남은 일반형의 석탑이다. 탑 몸돌 부분은 탑 몸돌과 지붕돌이 한 돌로 되어 있다. 초층 탑 몸돌 앞면에는 문짝과 자물통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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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서원 묘정비와 두암리 삼층석탑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남는 것은 화려한 감상이 아니라, 조용한 질문 하나였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이다. 옥천 조헌선생은 자신의 자리를 좁히는 직언을 멈추지 않았고, 위기의 순간에는 글이 아니라 몸으로 나섰다. 그래서 그의 흔적은 웅장한 유적보다, 이렇게 마을 안쪽과 산자락에 조용히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이원면에는 다시 나무를 심고 땅을 고르는 손길이 이어질 것이다. 씨를 뿌리는 일은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없지만, 결국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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