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에 관하여
호랑이 유형 특징
장점: 말을 잘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잘함. 술과 골프를 활용한 사내 정치에 능하며 기선제압에 탁월함
단점: 실무능력과 조직관리 능력이 없어 위아래로 눈치만 봄. 결국 자기가 한 말에 직접 걸려 넘어짐
0.
이 회사 면접날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찾아간 회사 본사는 ㅇㅇ종합경기장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옆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말 그대로 안이었다) 늦지 않게 30분 일찍 도착했으나 도저히 회사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하니 익숙하다는 톤으로 회사 앞 카페에 앉아 있으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알리오 빠네(agliopane) " 마늘빵이라는 뜻의 이 카페는 커피도 팔지만 운동 오는 아주머니를 위한 다양한 건강차를 팔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시킨 커피에서는 미숫가루 맛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스푼으로 모든 차를 저어서 주는 곳이었는데, 내가 먹기 직전에 주문한 사람에 메뉴에 따라 내 커피맛이 달라지는 짜릿한 카페였다!)
첫 출근날도 잊을 수 없다. ㅇㅇ종합경기장 안에 위치했지만 스마트 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던 그 회사는, 지정석이 없이 매일 원하는 곳에서 일하는 곳이라 팀장은 자기 팀원이 어디서 일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회사는 나의 첫 출근을 팀에 알리지 않았고 첫 출근날 점심을 혼자 지하 백반집에서 먹었다. 다행히 제육 반찬이 있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이처럼 첫인상은 생생히 오래간다. 나중에 바꾸기도 어렵다. '처음에는 ㅇㅇ 하게 보였는데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네요'처럼 단서 조항으로 항상 달고 살게 된다. 그래서 회사 생활에서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그래야 면접도 잘 볼 수 있고 프레젠테이션도 잘할 수 있고, 이는 곧장 내 연봉과 역량 평가로 연결된다. 내가 잘 못하는 영역이다 보니 기가 막히게 기선제압을 성공해내는 이들을 유독 잘 기억하는데 호랑이 팀장의 기선제압은 손에 꼽히는 완벽한 사례였다.
1.
일하며 만나본 가장 무능력한 전 팀장이 성추행으로 물러나며
"여러분 규정을 잘 지키면서 일해야 합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라는 희대의 멘트를 날리며 사라진 몇 개월 뒤, 호랑이 팀장은 대표의 1년간의 끈질긴 구애작전을 통해 영입되었다. (무능력한 팀장이 했던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말은 '저, 이 회사 오래 다닐 거예요' 였는데 다행히 회사는 이전부터 팀장 교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ㅇㅇ전자 마케팅팀 출신, 급부상한 ㅇㅇ 방송국 마케팅팀을 2배로 키우며 그룹의 마케팅 히어로로 급부상한 그를 대표가 그 시점에 팀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호랑이 팀장 출근 첫날, 대표와의 간단한 티타임 이후 그는 팀원들을 대회의실에 소집했고, 첫 상견례 자리가 마련되었다. 적당한 키에 마른 체격, 짧게 자른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감추는 무태 안경, 무신경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본인의 몰 스킨 위클리 다이어리(회사에서 지급하는 업무용 다이어리는 따로 있다)에 꽂혀있는 파버 카스텔 연필. 팀원들을 한 명씩 바라본 후 시작된 그의 첫인사는 다이어리만 쳐다보고 있던 팀원들의 고개를 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 품새는 너무 전형적인 '저 마케터예요' 모습이었다)
"제가 오기 전에 이 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호?' 박력 있었다. 아니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팀원들의 분위기가 왜 이모양인지 말하기는 싫지만 반드시 언급해야 할 전 팀장의 똥 짓을 그는 그렇게 첫 멘트로 날려버렸다. 이어서 그는 구체적으로 우리 팀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언급하며 칭찬을 이어나갔고 팀원들은 이제 다이어리에 머물던 시선이 호랑이 팀장의 눈을 넘어, 천장을 바라보며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듯했다.
'오 내가 놓아 버린 건 어떠한 사랑인지
생애 한번 뜨거운 설렘인지
두 번 다시 또 오지 않는 건지
그땐 미쳐 알지 못했지 예예예예예 예'
- 이적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사실 우리들은 무능력한 팀장 때문에 우리도 무능력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능력한 팀장의 만행이 우리 팀원들의 만행으로 생각할까 봐 미리 억울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돌이켜보면 호랑이 팀장의 첫 멘트는 전 팀장의 만행을 얘기한 게 아니라 정말 우리 팀이 했던 일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 성과를 잘 이어가겠다는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안도했고 또 기대했다. (아니, 안도하고 싶었고 기대하고 싶었다)
"콘텐츠 마케터의 숙명은, 콘텐츠가 잘되면 콘텐츠가 좋아서, 콘텐츠가 안되면 마케팅팀은 뭐하냐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를 뛰어넘는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잘 놀고 잘 먹야하니, 재미있게 일해봅시다"
울뻔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랬다.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가 한 문장에 정리되었다. 눈치 없는 대리 한 명이 기고만장해져서 어설픈 드립을 팀장에게 날렸으나 그 또한 유연하게 받아치며, 그는 새로운 우리 팀 팀원 면접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2.
아직도 호랑이 팀장의 첫 만남이 이렇게 생생히 기억난다. 콘텐츠 마케팅이라는 커다란 산을 지키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가 내려온 것 같다고나 할까?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했지만 그의 말은 주어 서술어가 완벽히 호응되었고, 적절한 어휘 사용과 감정선을 품은 적절한 목소리 톤, 적확한 딕션과 버벅거림 없는 전개가 완벽했다. 익히 들어왔던 프레젠테이션 실력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념 없는 대리의 멘트를 유연하게 받아주는 유머감각까지... 지금은 호랑이로 칭하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말로만 듣던 전설의 동물 용이 아닐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임 후 첫날 그가 직접 뽑은 경력직 사원(이후 등장할 뱀 대리)이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타 팀 과장과 6개월 만에 결혼하고 이혼한 뒤 퇴사한 것처럼, 호랑이 팀장과 팀원들의 허니문은 1년이 채 가지 않았다. 그 뱀 대리의 마지막 명언처럼, 그 팀장과 우리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관계인 것을 감사해해야 할 지경이었다.
"혼인 신고는 안 하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나중에 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하던 날, 나의 레퍼런스 체크 대상에 그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