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늬밤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인데,
어떤 힘든 순간이 있으면, 그 이야기를 다 해결된 다음에 주절 주절 하는 경향이 있다.
폭풍우 속을 지날 땐 가급적 아무 소리 안 하다가, 그게 끝날 즈음 사실은- 이라고 말하는 습관이다.
아마도 감정에 너무 동요되어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쏟아내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
하지만 내 반대편에 서 있는 연인이나 혹은 누군가는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 라고 한 마디씩 거들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습관을 쉽게 고칠 수 없었다.
지금의 남자친구도, 아니... 이젠 전 남친이 되어버린 그 사람도
그 부분을 몹시 안타까워하곤 했는데 아주 오랫동안 굳은 습관은
마치 벽에 오랫동안 붙어서 제거되지 못한 스티커 자욱처럼 그렇게 쉽게 사라지질 못했다.
더구나 한참이 어린, 한뼘하고도 반이나 어린 그에게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시작해야 할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그렇게 또 그 커다란 일은 시간에 갈려서
뾰족했던 끝이 뭉뚝해지고 선명했던 상흔도 흐릿해져 버려서
결국 그때- 사실은-으로 시작하게 되었었다.
그 일이 반복되던 언젠가, 그는 내게 걱정이 담긴 화를 냈는데
그마저도 나는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한참을 머뭇대다가 결국은 입을 뗐다.
간단한 것이면 말하면 되는데,
너무 복잡하고 긴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땐 이름, 그냥 이름 부를게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
그랬다.
정말 너무 벅차고 힘겨워 참을 수 없이 괴로운 날의 한 가운데를 지날 때
도무지 그냥 넘어가지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곁에 서 있는 다정한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부른 이름 하나에 많은 감정과 속상함, 서글픔이나 서러움 등이 담겨 그에게 닿았을 때
그 사람의 응? 하는 대답소리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붙들 수 있는 옷자락. 내가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
그것으로도 나는 그 서럽고 외로운 시간을 다시 버텨 견뎌낼 수가 있었다.
사귀는 내내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길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칭얼대던 그가 드디어
이름만 달랑 부르고 멈추는 의미를 깨달았을 시기가 작년 가을,
보늬밤을 만들어 같이 나누던 즈음이었을 거다.
그리고 우린 헤어졌고 벌써 1년이 넘어 보늬밤을 만들 시기가 되었다.
보늬밤은 만들기 힘들다. 정확하게는 번거롭다.
밤은 팍팍 까야 제맛인데, 외피만 살짝 벗겨내야 하는 스킬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조금만 힘을 주면 내피가 훅- 벗겨지고, 너무 적게 까면 나중에 여러 차례 긁어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요령이 필요한데, 아무리 요령껏 해도 오랫동안 칼을 쥐고 벗겨내다 보면 손가락이 얼얼해진다.
그래서 밤을 샀다면 일단 뜨거운 물에 한 시간 이상 좀 불려야 한다.
그래야 쉽게 벗겨진다.
그도 귀찮으면 사실- 요즘 율피밤이라고 해서 판다. 고맙게도.
비싸다고 느낄 순 있지만 사실- 들이는 수고를 생각해보면 전혀 비싼 게 아니니
율피밤에서부터 단계를 시작하면 생각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보늬밤을 만들 수 있다.
율피밤이 되었다면 그냥 끓이면 된다.
세번 정도 끓이면 되는데 처음에는 꼭 베이킹 소다를 넣어야 한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전날 베이킹 소다를 푼 물에 담가뒀다가 그 물 그대로 끓여도 좋고
정 시간이 없다면 베이킹 소다를 넣고 첫번째 삶는 과정을 진행해도 된다.
떠오르는 거품을 걷어내면서 끓이다가 물이 까맣게 변하면 (30분 정도) 조심스럽게 물을 따라내고
새롭게 물을 받아 다시 끓이는 과정을 반복한다.
한 두번 정도 끓이면 더 이상 거품이 올라오지 않는데 이 때 물을 조심스럽게 따라내고
남아 있는 심지를 이쑤시개로 조심스럽게 긁어낸다. 긁어내는 편이 이후 먹을 때 식감이 좋다.
마지막으로 끓일 때는
양조간장(진간장) 약간, 설탕은 밤의 40~60%, 물은 남은 밤의 무게와 동일하게 넣는다.
여기에 향을 더하고 싶다면 럼주나 와인을 넣어도 좋은데, 어차피 다 날아갈 거라서 나는 와인 1/3 콸콸.
와인은 집 앞 편의점에서 산 7900원짜리 레드 와인을 썼는데 큰 무리 없다.
설탕을 좀 줄일까 하다가- 저장성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기에 결국 60%로 맞췄더니 적당히 달달했다.
빨리 먹을 거라면 유리자 같은 데 담아둬도 좋지만
오래 보관할 거라면 밀폐형 유리병을 거꾸로 놓고 끓여 열탕소독하고 졸여진 보늬밤을 조심스럽게
병 안에 넣고 국물을 끝까지 자박하게 부은 후에 꽉 닫아 뜨거울 때 뒤집어 두면
오래도록 천천히 먹을 수 있다.
나중에 병뚜껑을 열 때 뻥- 하고 소리가 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올해 보늬밤은 처음으로 럼주 대신 와인을 넣었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하나를 갈라 입에 넣으면서 헤어진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아마도 몹시 좋아하며 두 발을 구르듯, 냠냠 맛있게도 먹었겠지.
참 따뜻하고 상냥했던, 늦가을 햇살처럼 시원한 웃음을 가졌던 사람.
요즘 너무 바쁘다. 너무 너무 바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시작한 서비스 기획 과정은 끝이 보이는데 나는 아직 과제를 쳐다도 못 봤고
쉬는 날은 차곡차곡 까여서 결국 이번 달에 연차를 제외하고도 11번을 더 쉬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본부장님과 상의해서 반은 수당, 반은 11월 말이나 12월 정도에 몰아 가기로 했다.
그나마도 연차 소진은 꿈도 못 꾸고 있다.
그런 것들 외에도 심적으로도 꽤나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 듀얼 트랙으로 쏟아지고 있어
나는 정말이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버렸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