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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Feb 18. 2023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영화 <바빌론>


‘무성’에서 ‘유성’으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

꿈속으로 뛰어들고 장렬하게 산화했던 

100년전 청춘들의 이야기


1920년대 할리우드는 ‘와일드 웨스트 시대’였다. ‘개와 배우는 출입금지’라는 안내판이 비로소 한 곳씩 떼어지던 때. 여전히 영화는 주류가 아닌 신생 매체였고, ‘품격’보다는 ‘저속’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평가받던 때.


영화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영화를 찍다 사람이 죽는 일도 허다했으니, 영화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겠나. 하루 종일 몇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하다가, 해가 지면 새벽까지 술, 마약과 섹스가 범람하는 파티를 벌였다. 다시 해가 뜨면 촬영장의 하루가 시작되고, 해가 지면 쾌락의 향연이 이어졌다. 황홀하면서도 위태로운 고대 도시 바빌론처럼.


고급 저택의 한 파티장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매니(디에고 칼바) 우연히 넬리(마고 로비)를 만나고 꿈에 그리던 날것의 엔터테인먼트 세계, 영화판에 발을 들인다. 야수들만 살아남는 곳에서, 넬리와 매니는 각자 배우와 매니저로 입문해 저돌적으로 미생을 헤쳐나간다. 기울기는 다르지만 그래도 저마다의 상승 곡선을 그리던 때, 폭탄 같은 사건이 떨어진다. 바로 ‘유성 영화’의 등장이다.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영화 <바빌론>은 무성 영화(silent film)에서 유성 영화(talkie)로 넘어가던 격동의 시기를 그린다. 당시 영화사에서 사운드 기술의 도입은 단순히 영상에 음향을 입힌 트렌드가 아니라, 영화 제작 방식과 위계질서를 모두 뒤흔들었던 사건이었다. <재즈 싱어>를 시작으로 목소리와 노래, 음악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정서를 전달할 수 있는 신예들은 스타가 됐고, 무성 영화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은 과장된 표정과 동작 연기에 물든 탓에 한순간 명성이 사라졌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누군가는 상승, 또 하강하며 삶의 그래프가 교차한다.


디렉터스 코멘터리에 따르면,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바빌론>을 만들기까지 거의 15년 동안 구상하다 파라마운트의 손을 잡아 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하고 싶은 거 다한 느낌이다. <바빌론>에서는 모든 게 넘쳐흐르고 극단까지 치닫는다. 데이미언 셔젤은 과거의 재현을 넘어 정확한 고증을 원했고, 그 시절 영화 스튜디오까지 지었다. 비유하자면 ‘세트 안의 세트’까지 만든 셈. 존 콘래드(브래드 피트)를 주축으로 900명이 창과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장면도 CG가 아니라 당시 촬영 기법을 살려 35mm 코닥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여기에 음악 감독 저스틴 허위츠는 1920년대 재즈에 락앤롤, 현대 댄스 장르를 곁들여, <위플래시>의 질주하는 광기와 <라라랜드>의 차분한 공허함을 배합했다. 배우들의 저돌적이고 폭발적인 연기와 어우러져, <바빌론>은 화려한 비주얼과 강렬한 색감,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로 혼란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제28회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미술상’, 제80회 골든 글로브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 아카데미에서 ‘프로덕션 디자인’, ‘코스튬 디자인’, ‘오리지널 스코어’까지 3개 부문 후보에 오른 데 공감할 수밖에 없다.



삶은 찰나지만


<바빌론>에서는 마치 바벨탑처럼, 신에 닿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 극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신적인 존재처럼 스타의 정점에서 영원히 불멸의 인기를 누릴 거라고 생각한 이들의 시대도, 언젠간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극중 칼럼니스트로 나오는 엘리노어(진 스마트)의 대사처럼 영화를 재생하면, 배우는 그 안에서 몇 번이고 살아난다. 영화를 통해 영원히 이야기되고, 기억되는 것.


배우뿐 아니라, 영화와 콘텐츠를 만드는 현장도 유기체 같다. 감독, 촬영과 음향, 투자, 홍보 마케팅, 분장, 소품 담당까지 무수히 많은 역할들이 뭉쳐, ‘액션’ 소리에 모였다가 흩어진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바빌론>은 “할리우드와 예술이 야기하는 모든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다른 영화와 달리, 주조연이 아니라 등장 순으로 정리한 크레딧 또한 이를 반영한다.


중년이 된 매니가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느끼는 회상 장면도 마찬가지다. 잉크가 퍼지면서 흑백 무성 영화를 거쳐, 컬러 유성 영화의 컷이 나오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사건들과 빼놓을 수 없는 명작들이 1~2초 단위로 빠르게 교차 편집된다. 이후 극장 한 열마다, 관객 한 명마다 얼굴을 비추고, 버드아이로 전체 상영관을 조망했다가 다시 스크린을 비추는 연출은 거대한 영화사의 흐름 속에서 <바빌론>을 보고 있는 우리조차 역사의 일부로 바꾼다. 



유행은 빠르게 바뀌고, 변화는 불가항력적이다. 영화 제작과 홍보에도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대중에게 사랑받거나 외면받거나, 둘 중 하나인 냉혹한 현실에서 희열과 절망이 엇갈린다. 그래서인지 매니의 ‘Te amo, Te amo, Te amo’, 존 콘래드의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라는 반복되는 대사를 듣다보면, ‘사랑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사랑해줘, 그리고 기억해줘’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헌사다.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위한. 데이미언 셔젤, 자신을 위한. 그리고 오늘도 한 팔을 뻗어 <바빌론>의 벽돌을 얹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비록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영화여 영원하라.





<바빌론(Babylon)>

개봉 |  2023년 2월 1일 

감독 |  데이미언 셔젤

출연 |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 진 스마트, 조반 아데포, 리준리, 토비 맥콰이어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제작 |  파라마운트 픽처스

배급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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